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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Jun 20. 2022

사르트르, <존재와 무> - 우연과 필연

사주팔자, 편인

  나 자신을 결정함으로써, 사물의 역행률과 그 예견불가능까지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닐까 그러므로 사람의 일생 속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갑자기 폭발하고 나를 끌고 들어가는 사회적인 사건도 밖에서 찾아오는 건 아니다. 만일 내가 어떤 전쟁에 동원된다면, 그 전쟁은 ‘나의 전쟁’이다. 그 전쟁은 내 모습을 닮았고, 나는 그 전쟁을 치를 만하다. ... -p885


  ... “플로베르는 그 정도로 야심적이었다. 그는 그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그가 그런 인물이었는지 자문하는 것은, 어째서 그는 키가 크고 금발이었는지를 알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질없는 일이다. 우리는 어디선가 멈추어 서야만 한다. 그것이 모든 현실적 존재의 우연성 그것이다. 이 바위는 이끼로 덮여 있는데, 그 옆에 있는 바위에는 이끼가 하나도 없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문학적인 야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형 아쉴에게는 그런 야심이 없었다. ... -p893


  얼핏 서로 상충되는 이야기 같지 않아? 어느 페이지에서는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고, 다른 페이지에서는 우연이라 말하고... 삶이란 게 그렇잖아. 내 상식 내에서 인과나 상관이 명확할 때는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 범주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내 이해를 넘어선 우연으로 다가오는 것들이니까.


  ‘역행률’이란 건 바슐라르의 용어인데, 이를테면 길이 막히면 다른 길로 턴을 할 것이냐, 막히면 막히는 대로 천천히 갈 것이냐를 고민해 보듯, 사물로부터 생각이 발생하는 경우. 길이 막히지 않았으면 저런 역행적 사고도 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게 하이데거의 존재사건 개념이기도 하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대자’로 설명한다. 사물 그 자체는 ‘즉자’, 내 이해와는 상관없이 원래부터 그냥 거기에 그렇게 놓여 있던 우연이다. ‘우연’으로 대변되는 사르트르의 철학이지만, 흔히 우리가 말하는 ‘우연’이란 의미에 한정되는 건 아니고, 이렇듯 좀 더 확장된 개념이다. 그러나 그 사물로부터 일어나는 어떤 행위나 생각은 나의 지향성에 근거하여 의미화되는 ‘대자’라는 것.


  나의 지향성이 맞닥뜨리게 되는 환경적 조건은 우연적이지. 같은 가풍에서 자란 형제도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의 성향이 다를 테니까. 그럼에도 그 우연에 대한 의미화는 자신이 지닌 지향성에 준한다는 거지. 우연 속에 던져졌어도, 그가 살아가는 시간은 결국 그를 닮았다.


  사주팔자로 예를 들면, 명리학계의 화두인 ‘편인’으로 위 사주를 해석해 보자면...


  월간에 정인이 있다는 건, 사회적으로 사랑을 많이 받는 환경에서 자랐을 가능성. 그런데 일지의 편인은, 자신은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항상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에 시달리는 것. 그렇다 보니 자신을 향한 사랑에 대한 피드백도 조금 삐딱한 말로 되돌려 때가... 실상 더 사랑받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하는 거. 그런데 사랑하는 입장에서는, 뭘 해도 눈치가 보이니까, 뭘 해도 되레 상처의 말들이 돌아오니까, 어느 순간부터 지치면서 아예 말을 잘 안 하게 되는 거야.


  그러면 편인은 더 확신하게 되는 거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이게 반복 순환이 되면서 외로움을 달고 사는 거야. 그래서 겉으로는 다른 이들과 더 활발히 교류하는 모습을 보이려 애쓰기도... 그런데 사랑하는 입장에서는 이게 더 박탈감인 거지. 자신이 그들보다 못한 존재라는 듯한 느낌이 들긴 하니까.


  그러나 결국 편인은 대인 관계로서는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어서, 차라리 예술과 철학에 몰두하는 거. 편인을 지닌 사람들이 일부러 그러는 것이기야 하겠어? 그도 어쩔 수 없는 팔자 소관, 인과까지는 아니더라도 상관이긴 한 인생방정식. 어찌 됐든, 내가 살아가는 시간은 나를 닮았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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