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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Sep 14. 2022

가라타니 고진, <일본 정신의 기원>  - 라캉, 주체

슬램덩크 

마루야마의 생각에 따르면 나치에게는 적어도 명료한 의지와 주체가, 따라서 책임이 존재했다. 나치에 비해 일본의 파시즘에는 명확한 정치적 주체가 없으며 따라서 책임의식이 없다. 일본에서는 분명히 행동은 있었지만 아무도 그 주체가 아닌 것처럼, 모든 것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처럼 보였다. 마루야마는 그것을 ‘무책임의 체계’라고 불렀고 그러한 시스템을 ‘천황제의 구조’라고 생각했다. - <일본정신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송태욱 역, 이매진, p55 -


... 마루야마나 다케우치는 자기(주체)의 부재라는 것을 일본 사상의 결함으로 비판했지만, 그러한 근대적 주체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은 서양에서 온 것이다. 근대 서양 고유의 주체나 원리성이라는 편집증적 경향이 부정되고, 주체나 원리성을 갖지 않은 정신분열증적이고 비체계적인 사고가 장려되었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이라면 원래 일본에도 있지 않았는가 생각했다. 동시에 사람들은, 전후에 창고에 치워져 있던 니시다 기타로 등의 ‘근대의 초극’ 사상을 끄집어냈다. 그 결과 일본이야 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첨단을 달리게 된 것이다. - 같은 책, p57 - 


...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의 말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이를테면 세계종교에 의한 거세가 ‘배제’ 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해야 하다. 그런 상황은 불교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곧바로 ‘뿌리내린’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무엇이든 받아들인다는 것은 일종의 배제의 형태인 것이다. 그 결과, 불교는 도처에 침투하면서 계속해서 외래적인 것으로 있게 된다. - 같은 책, p62 -

  사진은 <슬램덩크>의 배경지인 가마쿠라의 에노시마. 2020년에 간 게 아니라, 그 몇 년 전에 갔었는데, 올림픽 경기장으로 선정됐다는 경축 현수막이 걸려 있었던... 그 옆으로, 일본의 상징과도 같은 ‘신도(神道)’, 가라타니 고진이 위에 언급한 내용의 한 예로 들고 있는 경우.


  신도는 일본으로 유입된 여러 외래 종교가 융합된 다양체이면서도, 기본적으로는 불교의 영향이란다. 그러나 불교 자체는 일본화가 되지 않은, 외래의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거야. 중국에 불교가 유입될 땐, 선교의 주체들부터가 중국의 풍토를 고민했다. 그래서 중국어의 성조가 산스크리트어의 영향이라는 말이 있는 거고... 세계종교란 각자의 토착화 방식을 따르는 다양체적 속성이라는 거지. 본류의 입장에서는 타자의 상징계에 영향을 받는 것. 가라타니 고진은 정신분석의 용어를 빌려 ‘거세’가 되었다고 표현한 거야. 


  <슬램덩크>로 예를 들자면, 그 시절만 해도 일본 만화의 등장인물들이 한국식 이름으로 번안이 되어야 했으니까. 우리 또래는 ‘강백호’로 기억하는 한국식의 추억이지, 굳이 ‘사쿠라기 하나미치(櫻木花道)’의 일본풍으로 구분하지는 않는 경우. 요즘은 그렇지 않잖아. 일본 만화의 번역에 한국의 정서를 덧대지는 않으니까. 같은 맥락에서, 일본은 외래문화의 유입에 열려 있었으면서도 도리어 일본의 풍토로 자국화가 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거야. 그것을 라캉의 ‘주체’적 성격으로 설명하고 있다.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자아’와 ‘주체’가 어떻게 구분되는 개념인가 하면... 이를테면, 남들도 욕망하니 나도 욕망해야 하는, 타자의 영향권에서의 비자발성이 주체 개념이다. 그래서 주체는 비어있다고 말하는 거. 반면 자아는 남들이 욕망하는 걸 꼭 나도 욕망해야 하는가 정도는 자문하는 의식의 영역이고... 주체는 상징계에, 자아는 상상계에 속하는데, 그게 꼭 명확히 구분된다기 보단, 함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라캉에게서 주체란, 우리의 일상적인 말로는 주체적이지 않은 경우를 뜻한다. 


  물론 문화 전반에 걸쳐 다 그런 건 아니고, 가라타니 고진도 인용은 하되 비판적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돈까스만 봐도 그렇잖아. 일본화된 경우는 얼마든지 있고... 


  그럼에도, 들뢰즈 같은 철학자는 ‘분열증’적 비체계적 사고를 도리어 긍정하듯, 일본의 ‘주체’성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빛을 발했다는 이야기. 베트남전으로 촉발된 68혁명이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그 세대의 일본 지식인들은 상당히 진보적인 열린 체계였단다. 그 시대에 불타는 청춘이었던 가라타니 고진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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