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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Oct 14. 2022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서문

보르헤스, '어떤 중국 백과사전'

이 책의 탄생 장소는 보르헤스의 텍스트이다.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에게 존재물의 무질서한 우글거림을 완화해 주는 정돈된 표면과 평면을 모조리 흩어뜨리고 우리의 매우 오래된 관행인 동일자와 타자(他者)의 원리에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오래도록 불러일으키고, 급기야는 사유의 친숙성을 깡그리 뒤흔들어 놓는 웃음이다. 


보르헤스의 텍스트에 인용된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서는 “동물이 a)황제에게 속하는 것, b)향기로운 것, c)길드여진 것, d)식용 젖먹이 돼지, e)인어(人魚), f)신화에 나오는 것, g)풀려나 싸대는 개, h)지금의 분류에 포함된 것, i)미친 듯이 나부대는 것, j)수없이 많은 것, k)아주 가느다란 낙타털 붓으로 그린 것, l)기타, m)방금 항아리를 깨뜨린 것, n)멀리 파리처럼 보이는 것”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이로운 분류에서 누구에게나 난데없이 다가오는 것, 교훈적인 우화의 형식 덕분으로 우리에게 또 다른 사유의 이국적인 매력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의 사유가 갖는 한계, 즉 그것을 사유할 수 없다는 적나라한 사실이다. 


-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역, 민음사, p7 -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한 서문. ‘동일자와 타자의 원리’란 보편성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분류를 할 때는 보통 어떤 기준이란 게 있잖아. 보르헤스의 분류에는 그런 게 없고, 그냥 막 한 거고... 그러니까 분류라는 게 의미가 없는 거다.


  과학이 인문의 범주이냐가 애매할 때가 있잖아. 그래서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이란 용어로 나누기도... 왜 이게 애매하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푸코의 지적은 언어를 매개해 선행하는 질서 체계가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것이 권력으로 작동할 땐,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들에 대한 소외와 배제를 발생시킨다는 것. 


  각자가 좋아하는 작가와 문체, 장르가 있고... 그 각자의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도 꽤 하지. 실상 존중하지도 않고 기어이 한 마디의 품평을 내뱉고 싶어 하는 이들이...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철학이 세련된 문체일 테고,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문학이 우아한 문체일 테고... 그러나 푸코의 지적은 단지 '차이'에 관한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이 과연 문체에 대한 주체적인 판단일까? 이미 사유와 감각 자체가 특정 담론에 종속되어 있는 것. 서점가의 철학자들처럼 쓰고 싶고, 문단의 문인들처럼 쓰고 싶은... 결국 취향의 글쓰기라는 것도 자신만의 글을 쓰는 게 아닌 이미 클리셰다.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말로 생각을 표현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말의 요구에 따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 맥락이 푸코의 대중적 키워드인 ‘권력적 지식’으로까지 이어지는 거. 이번 추석에 성균관에서 제사 때 전은 부치지 않아도 된다고 ‘공표’했잖아. 이제껏 뭐 하다가 이제야... 그동안 고생한 며느리들은 어쩌라고... 체계는 질서, 미덕, 도덕이라는 명분으로 권력화가 된다. 실상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무런 타당성도 없는, 그저 우연적으로 습관화된 것들이거나 기득권 담론의 정당화이거나 하는 형편없고 볼품없는 기원이었다는 거야. 푸코를 대변하는 지식의 고고학이란,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십분 활용한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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