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편집장 Oct 22. 2022

<슬램덩크> - 약체의 열정, 신화창조

모교 야구부 이야기

  오래 전에 해체된 내 모교의 야구부는, 소위 ‘막차팀’이라 불리던 전국 최하위의 약체였다. ‘막차팀’이란, 대회 선서에 이어지는 1회전에서 깨지고 그날 막차를 타고 내려온다 하여 붙여진 별명. 늘, 언제나, 항상 그래왔던 모교 후배들이 대박을 터뜨린 어느 해가 있었다. 청룡기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것. 그리고 나는 그 주역과 함께 교생실습을 했었다.


  이미 롯데 자이언츠로의 입단이 확정되었던, 연세대에서 4번 타자 자리를 꿰차고 있던 체육 교생. 녀석에게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서울의 한 야구 명문고에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던 2진급 선수들이 단체로 전학을 왔다. 여기에는 학원 비리 같은 문제가 엮여 있었나 보다. 2진급 선수들은 자신이 정말인지 2진인지 1진인지의 평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상태, 더럽고 치사해서 야구의 변방으로까지 옮겨와 주전의 기회를 잡았다. 어차피 항상 선수 수급에 어려움을 겪던 모교 입장에서도 윈윈의 전략이었다.


  명문의 2진과 무명의 1진들이 모여 그렇게 일을 내버린 것이다. 지금까지도 청룡기의 역사에서 명승부로 기록되고 있는, 준결승 경기가 인상적이다. 내내 큰 점수 차로 끌려가다가, 정말 한 편의 영화처럼 9회 말에 뒤집었다. 그리고 역전타의 주인공이 체육 교생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준결승에 모든 힘을 쏟아 부은 탓인지, 결승전에서는 막차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 했다고...

  <슬램덩크>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이 스토리텔링이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아니 스토리텔링 작업 자체가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약체의 반란’이란 주제였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전통의 강호들의 ‘어차피 승승장구’가 재미있는 소재일 리도 없을 테니. 


  우리에게 <슬램덩크>는 그런 갈망의 투영이었는지 모른다. 한 번도 강자에 입장에 서 본 적이 없었던 이들에게 건네는 격려와 고무의 메시지, 그러나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말초적인 희망만을 제시하진 않는다. 전통의 강호들이 보여준 열정 역시도 저마다의 최선이었기에, 그 모두가 북산의 기적을 위한 제물로 사라져가는 전개 역시 다소 허망하다.


  북산의 선수들만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강호들이 북산에게 당한 일격이 결코 열심히 하지 않은 방심의 결과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저 한 줄의 나레이션으로 북산의 패배를 대신했던, <슬램덩크>의 결말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롯데 자이언츠를 입단이 확정되었던 후배는, 프로에서 별 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일찌감치 은퇴를 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전해 듣지 못했다.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열정들도 그 모두가 농구선수로서의 삶을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상의 스토리 밖에서도 그게 현실이지 않은가. 누군가는 꿈을 이루고, 누군가는 꿈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방향성이 내 운명이었는지는 사후적으로 해석되기 마련. 농구 선수의 경력을 바탕으로 <슬램덩크>의 결실을 그려낸 이노우에 다케히코처럼... 그가 농구선수로 성공했다면, 나에겐 학창시절의 행복한 추억 하나가 없었을 것이며, 이 원고가 쓰여 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듯 꺾이면 꺾이는 대로 삶은 이어지고, 그 꺾인 방향에서 다른 꿈이 잉태되기도... 내가 지금 글을 쓰며, 편집을 하며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작가의 이전글 미셸 푸코, <말과 사물> - 바벨의 언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