敝則新(폐즉신), 해지면 새로워진다.
하이데거는 道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존재에 대해 다시 숙고하게 되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도에 대한 관심은 그의 생애에 있어 중요한 에피소드이다. 1946년은 그의 생애에 있어 학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삶의 위기였다. 당시 그는 <도덕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기획에 착수했다. 그는 중국인 학자인 폴 쉬이 샤오(Paul Shih-yi Hsiao, 蕭師毅)의 도움을 받으면서 오랫동안 공들였지만 텍스트의 극히 일부밖에 완성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이 그를 변하게 한 것은 확실하다. ...
- <서양, 도교를 만나다>, J.J. Clarke, 조현숙 역, 예문서원, p348 -
서양철학으로 제자백가를 해석하는 논문을 쓰던 시기에, 그 비슷한 다른 논문들을 참고할 일이 많았다. 한 동안은 포스트모던의 ‘해체’적 관점을 노장사상으로 해석하는 주제가 유행이었던지, 찾아보면 엄청 많다. 그런데 이걸 꼭 서양에 대한 극동의 비교우위로 말할 건 아니지. 서구 철학은 백인 우월주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라고 하고 있는 거니까.
하이데거에게 저 시기는 ‘후기’에 속하는, 초야에 묻혀 시문학에 대해 많이 생각하던 시간. 이때 간간이 찾아오는 사르트르를 귀찮아했대. 하이데거는 자신이 사르트르와 함께 ‘실존’의 계보로 묶이는 걸 썩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전환은, 물론 나치에 협력했던 날들에 대한 가책 때문이겠지. '敝則新(폐즉신) 해지면 새로워진다', 꽤 오래도록 나는 이 <도덕경>의 구절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니체의 글들을 읽어보니 그토록 쉽게 이해가 되는 의미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무너져야 그 너머가 보이는 거니까. 그전까지야 그 ‘너머’가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는 거고... 그렇듯 사상사의 거점들은 통하는 면이 있다. 무엇이 무엇에, 누가 누구의 우위를 점하는 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