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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Dec 17. 2022

영화 <그린 북> - 문화의 차별

Black or white

  미국 사회 내에서 제도적, 규범적 차원을 넘어 흑인에 대한 문화적 인식이 변하게 된 사건이 마이클 잭슨이란다. 마이클 잭슨의 음악들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 창법이나 소울이 흑인 계열이지 음악 자체는 락 베이스다. 즉 백인도 수요할 수 있는 카테고리였다는 것. 


  영화는 마이클 잭슨의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에 백인의 문화로 천재성을 인정받은 흑인 뮤지션에 대한 이야기다. 백인 사회는 그의 천재성을 문화컨텐츠로 즐길망정, 그에 대한 대우는 여전히 ‘니그로’였다. 특히나 미국의 남부를 순회하는 콘서트 일정 중에도 그는 화장실과 식당을 따로 써야 하는 수모를 겪는다.

   남북전쟁의 원인을 들여다보자면, 노예 해방이라는 휴머니즘 이면에 산업화의 경제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남부는 면화를 재배할 노예들이 필요했던 반면, 북부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필요했던 것. 그런데 공장의 노동자는 곧 시장의 소비자이기도 하다. 때문에 흑인의 지위가 북부에서는 ‘인류’로서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셜리 박사가 북부에서만 활동했다면, 음악인으로서의 충분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입장이다. 그러나 굳이 남부로의 순회공연을 감행했던 이유는 음악으로서 백인사회의 편견을 없애보겠다는 신념에서였다. 그러나 한 천재의 이상은 늘상 이상한 현실에 발이 걸리고 만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클럽 기도'인 토니는 셜리 박사의 기사로 고용되어 남부로의 여정을 함께한다. 그 또한 흑인에게는 편견을 지니고 있던 백인 한량이다. 더군다나 ‘흑인 주제에’ 너무 고상한 척만 해대는 것 같은 셜리를 처음에는 탐탁치않아 한다. 그러나 무지한 귀에도 셜리의 음악은 감동적으로 들려오고, 나중엔 그가 말하는 ‘품격’에 조금이나마 동화가 된다. 셜리가 불러주는 문장대로 아내에게 쓴 편지를 나중에 가선 저 스스로 쓸 수 있게 되는 장면이 상징적이지 않나 싶다.

  고상한 ‘니그로’ 셜리 역시 점점 백인 한량의 소탈한 성격에 끌린다. 백인 문화로 자라난 흑인으로서, 당시 시대상에선 백인일 수도 흑인일 수도 없던 그의 외로움은, 매일같이 마주하는 고상한 백인들과는 전혀 다른 토니를 만난 이후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여름날 검둥이 시절'을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한 ‘켄터키’의 프라이드 치킨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지를 처음 알았고, 허름한 재즈 바에서의 잼이 그렇게 재미있는 문화인지도 처음 느껴보게 된다. 레비나스가 말하듯, 새로운 미래는 나와 다른 결의 타자와 함께 도래한다.


  흑인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었던 설리는, 피부색에 대한 편견이 아닐망정 문화에 대한 편견은 스스로도 지니고 있었던 것. 그러나 막상 그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 보니, 그것은 하위의 문화가 아닌 차이의 문화였다.

  유럽에게 아직 비유럽은 인류가 아니던 시절, 유럽의 귀족 부인들은 남자 흑인 노예 앞에서 서슴없이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유럽에게 흑인 노예는 자연의 범주에 속한, 휴머니즘의 대상이 아니었다.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인간의 근원적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적인 위계가 있는 게 아니다. 그 위계로서 자신들을 구별지으려하는 담론이 있을 뿐이다.

  영화의 주제는 인종차별과 더불어 문화의 차별에 관한 것이다. 책을 잘 읽지 않는 성향이었다가, 무슨 각성에서였는지 철학으로 글을 쓰는 삶을 선택한 경우이다 보니, 내 스스로 돌아보아도 신기할 때가 있다. 그런 경험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보니, 일부 인문학자나 철학도들이 지식을 대하는 태도가 가끔은 다소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에밀 졸라 아세요?”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의 이 대사로 대신할 수 있을까? 에밀 졸라가 뭐 어떻다고? 그 작가의 브랜드가 저 자신의 소양을 대변하는 척도인가? 내가 한문과 출신이라고 해서 서거정의 관각문학에 대해서 묻는 것을 세련된 소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터, 그냥 경험의 구조가 다른 것뿐이다. 나의 <슬램덩크>가 당신의 <목로주점>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런 스노비즘의 기호가치들이 부조리한 문화권력의 시니피앙인 건 아닐까? 그 에밀 졸라의 소양으로 지금 내가 지껄이는 말은 알아 듣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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