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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Jan 17. 2023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 플라톤의 원자 이론

이태백의 <춘야연도리원서>

  어느 화창한 봄날 나는 친구들과 하이킹을 하고 있었다. 열 명에서 스무 명 정도의 친구들로 대부분은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우리는 슈타른베르크 호수 서쪽 연안을 따라 구릉지를 걸었다. 환한 햇살을 받아 빛나는 너도밤나무 숲 사이로 빼꼼히 시야가 열리면 왼쪽 아래로 드넓은 슈타른베르크 호수가 아득하게 내려다 보였다. 나는 이 길에서 처음으로 원자의 세계에 대해 대화를 하게 되었고, 이 대화는 나중에 나의 과학 활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쾌활한 젊은이들이 약동하는 자연 속에서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시대적 상황 덕분이었다. 평화로운 시절 그들을 보호해주던 가정과 학교는 이제 혼란스러운 시대를 맞아 그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었으며, 대신 젊은이들에게 독립적인 사고가 싹터서, 사회 규범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점점 더 자신들의 판단에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 베르너 하이젠 베르크, 유영미 역, <부분과 전체>, 서커스, p9 -


... 저녁에 텐트 안에서 책을 낭송하거나, 식사 전에 시를 읊어야 할 때면 우리는 로베르트에게 도움을 구했다. 독일문학뿐 아니라 철학에 대해 로베르트만큼 많이 아는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 그런 로베르트가 우리의 대화에 불만을 표했다.

  “너희 자연과학도들은 항상 경험을 끌어다대지. 그로써 진실을 손에 넣었다 믿어. 하지만 난 그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어. 경험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봐. 사실상 너희가 하는 말은 너희의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거야. 과학은 생각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하지만 생각은 사물에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사물을 직접적으로 지각하지 못해. 우리는 지각 대상을 우선 표상으로 변화시키고, 그로부터 들어오는 것은 무질서하게 섞인 다양한 인상들이야. ... ” - 같은 책, p14 -


  ... 이런 대화를 하는 가운데 내 머릿속에는 일 년 전에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그 책은 바로 물질의 가장 작은 입자에 대해 논하고 있는 플라톤의 대화편 <티마이오스>로, 당시 나는 그 책을 탐독했고, 그 책에 사로잡혀 있다시피 했지만, 중요한 부분에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로베르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처럼, 물질의 가장 작은 입자에 대한 특히안 사상적 구조가 전개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같은 책, p18 -

  로베르트의 의견을 한 명의 철학자로 대신하자면, 쇼펜하우어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저 홀로 정립된 건 아니기에, 스피노자, 흄, 로크, 칸트 등이 이미 표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와 세계의 존재 그 자체는 일치되지 않는다는 거야. 쇼펜하우어는 그 바깥을 ‘의지’로 설명한 거고, 이게 니체와 정신분석으로 이어지는 것. 


  하이젠베르크가 무의식에 영역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 아닌데, 우리가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고민을 해보게 된 계기였고, 이전에 읽었던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적혀 있던 내용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전까지 그는 플라톤의 원자 이론을, 그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과학적 사고라고 생각했지만, 친구의 철학 이야기를 듣고서는 플라톤을 이해해 볼 수 있었다. 그는 ‘원자에 대한 경험은 간접적인 방식으로밖에 이루어질 수 없으며, 원자는 사물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는 인용한 구절처럼, 당시 시대상과 맞물리는 사유이기도 했다. 과학은 자연의 질서 체계를 구명해내는 학문이지만, 질서가 무너진 시대에 과연 ‘질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첫 에피소드에서부터 그가 어쩌다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고민하게 된 힌트들을 언급하고 있다.

  과학자의 에세이라 초반은 무난히 읽고 있다. 종교에서 철학이 분리되었고, 철학에서 과학이 분리되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양자역학은 다시 철학에서 길을 찾은 과학이란 말도 있고... 대표적으로 김상욱 교수만 봐도, 그가 물리학만 공부한 것 같진 않잖아. 문학을 사랑하는 물리학자들도 많고, 예술을 사랑하는 물리학자들도 많고... 서양 과학에는 ‘자연’이 없다는 동양학 전공자들의 편견도 그야말로 편견일 뿐이다. 말 안 통하긴 노장사상에 심취해 있는 이들이 더 하다는...


  이태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라는 글이 있는데, 그 해설로 따라붙는 관련 일화 중에 하나가, 일본의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가 이 글에서 중간자 이론의 영감을 얻었다는 것. 한문과에서는 한문 고전의 정당성을 피력하는 원 투 펀치 중에 하나. 한문학도들이 이 ‘중간자 이론’을 이해하고서 정당성의 논거로 삼는 것일 리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들어 쓸 뿐이다. 


  동양이 더 낫다, 서양이 더 훌륭하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닫힌 체계들들은 대개가, 정작 자신이 고수하는 체계에 대해서도 깊지 못하다. <춘야연도리원서>를 보다 이해하는 쪽이 한문학자일까? 물리학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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