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정신분석
매일 아침 바닷가로 나가 갈매기들과 어울려 노는 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자신도 해보고 싶다면서 갈매기를 잡아오도록 부탁했다. 다음날 아버지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바닷가로 나갔으나, 평소에는 그토록 잘 따르던 갈매기들이 그의 머리 위에서만 맴돌 뿐 내려오지 않았다.
<열자>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노장 계열로 분류되는 텍스트이기에 그 주제 역시 무위자연이다. 열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지극한 말이란 말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고 지극한 행위란 작위적이지 않은 것이다. 보통 지혜 있는 자들이 안다고 하는 것은 곧 천박한 것이다. (至言去言 至爲無爲 齊智之所知 則淺矣)”
예전의 초코파이 CF 카피로 대신하자면, 말하지 않아도 아는 情의 문제. 情이란 키워드로 성리학의 지식을 늘어놓을까 하다가, 막상 쓰려고 보니 내 경우가 ‘천박’에 해당하는 것이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그냥 살다보면 저 갈매기 일화가 무슨 이야기인지를 경험하게 될 때가 있다. 여자들의 육감이라던가, 강력계 형사들의 촉 같은 경우, 혹은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경우. 심리학 지식이 없어도 그냥 알겠는 상황.
노장 계열에서의 주장은 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능력을 퇴화시켜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의 정신분석이 이 지적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다. 하물며 갈매기도 아는 것을, 사람이 모를 리 있나? 다만 문명에 의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자연성이 사라진다는 것. 아직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시그널을 동물들이 먼저 감지하는 것 같지만, 원주민들은 먼 바다에서 이는 쓰나미의 징조를 먼저 감지하고 피신을 한단다.
그 사람의 글만 읽어봐도 그 사람의 대강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 행간에서 발생하는 것들이 그런 자연성의 효과인지도 모르겠다. 들뢰즈를 빌리자면, 이해와 인식의 영역이 아닌 공명과 생리의 영역. 하여 사랑에 ‘대해’ 쓴 글이 있고 사랑에 ‘관한’ 글이 있는 반면, 사랑으로 써내려간 글이 있는 것이고...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을 쓴 시가 아니라 사랑이 쓴 시’의 행간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거리며 울먹거리는 앳된 심정. 그렇듯 문명보단 자신이 떠나온 에덴의 기억을 더 많이 간직한 이들에게서나 가능한 에로스에 관한 이야기. 정신분석은 이로부터 현대인의 정신적 문제를 진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