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과 상징성
어벤저스 연대기를 보고 자란 세대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의 유년 시절엔 슈퍼맨이 하늘을 날 수 있는 이유를 빨간 망토에서 찾았다. 때문에 보자기를 목에 두른 채, 두 팔을 곧게 앞으로 펴고, 보자기가 휘날리도록 ‘뛰어’다녔던 기억. 머릿속으론 날고 있던 어린 슈퍼맨의 수고로움은 온전히 다리의 몫이었다.
그 순수함의 정신연령을 증명하고 있던 슈퍼맨의 표상, 그러나 실상 슈퍼맨이 지닌 활공의 능력은 그 비밀이 망토에 있는 건 아니잖아. 되레 바람을 가르는 속도의 저항만큼으로 세차게 펄럭이지만, 이걸 모순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망토가 없는, 순수 쫄쫄이 타이즈의 슈퍼맨을 상상할 수도 없을뿐더러, 망토의 펄럭임 자체로 슈퍼맨의 속도를 체감한다. 그렇듯 영화를 통해 대중이 소비하는 것은, 실용적 기능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절대화 된’ 이미지다.
보드리야르는 테일핀을 사례로 든다. 그 형태로부터 전해지는 심적 속도감은 있을 수 있겠으나, 실제 속도에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되겠어. 현대인들의 소비는 실용적인 쓰임새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꿈과 욕망에 포커스가 맞춰진다. 현대인은 이미지를 소비한다.
명품을 실용성으로 사는 소비자들은 없을 터, 그것들의 기능은 그것이 지닌 상징성 자체다. 보드리야르는 ‘공허한 기능주의’라는 풍자를 늘어놓기도 하지만, 어차피 역사 내내 존재했던 현상이고 현실이라는 것. 고대 그리스 지식인들의 동성애에도 일면의 기호가치적 의미는 담겨 있으니까. 인문학과 예술도 그러 면이 없지 않지. 때로 그 상징성 혹은 미적 취향이 되레 기능성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