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편집장 Aug 26. 2024

프루스트의 화가들 - 모네와 발터 벤야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루스트가 글쓰기의 중심에 두고 있는 관점의 문제, 그는 사물과 순간을 바라보는 방법을 회화에서 빌려오기도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화가 엘스티르가 그 단서를 제공하는 인물이기도 한데, 이는 모네를 염두에 둔 허구의 설정이란다. 주인공이 존경해마지 않는 화가는 다소 저열한 화풍과 예술혼에 몰두했던 젊은 시절을 고백하는데, 회한이라기 보단 경험의 비용이라는 의미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젊었을 적에 자기가 했던 말이나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게요. 생각만 해도 부끄럽고 끔찍해서, 차라리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추억 말이오. … 젊은이들에게 정신의 고귀함이니 도덕적 우아함이니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이 있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지. 사람은 자기 스스로 깨칠 때라야 비로소 현명해지는 법이라오.”

순간에는 왜 그랬을까? 미래에서 돌아보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은, 창피하다 못해 정말 죽어버리고 싶은 기억들. 그런데 또 그 순간에는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며, 고작 그 정도의 반성적 거리를 확보하는 게 내가 지닌 한계였던 것이기도... 엘스티르는, 이미 벌어진 일이고,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어찌하겠냐는 입장이다. 그렇게 허비된 시간들이 정말 허비된 시간으로서 사라져 가게 할 것이 아니라, 남은 인생을 위해 쓰여진 값진 수업료의 의미 정도는 되찾아야 하지 않겠냐는...


이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제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작가로서의 소명을 깨닫는 계기 역시 그가 겪은 모든 순간들로 인해서이다. 방탕하게 보낸 시절들조차도 ‘지금 여기’로 이어지고 있던 결정적 순간들이다. 그 기억이 아니었던들, 지금에 어떤 기억을 겪어야 하는 것인지 모를 일. 하여 그 과거들은 결코 잃어버린 시간들이 아니며, 미래를 통해 얼마든지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 과거라는 것. 


이 시간의 의미를 사회학적으로 확장한 경우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독일어 번역자이기도 했던 발터 벤야민의 역사 테제다. 이미 벌어진 사건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그것이 지니는 의미마저 고정되지는 않는다는 것. 미래로써 그 과거의 의미를 바꿀 수도, 과거의 의미를 바꾸어보려는 노력 끝에 다른 미래가 열릴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듯 상호적인 시간성 안에서 과거와 미래는 ‘지금’을 통해 변한다.

작가의 이전글 르 코르뷔지에 - 유니테 다비타시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