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에마, 노에시스, 에포케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서는 운전자들의 목적은 서로 다르다. 누군가는 간단한 요기를 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밀려오는 졸음을 쫓아내기 위해서, 누군가는 참을 수 없는 배변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저마다의 상황은 휴게소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배치를 저마다의 관점으로 읽어낸다.
휴게소로 진입하는 목적에 따라, 시야에 맺히는 기능의 배열이 서로 다르듯, 우리는 자신이 처한 심적 ‘결여’를 채울 수 있는 구성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즉 한 사건이 누군가에게 인식되는 조건이 서로 다른 것. 진리의 문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바로 ‘견해만큼 진실이 있다’는 현상학의 요지다.
각자가 지닌 이런 결핍적 성향을 ‘지향성’이라고 일컫는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각자의 지향성이 가닿은 대상의 조합으로 구성된 세계를 인식할 뿐이다. ‘지향성’이란 단어의 뜻 그대로 무언가를 향해 있는 마음의 속성은 결핍을 전제로 한다. 마치 빈 공간을 채워줄 퍼즐조각을 찾아내듯, 우리의 인식은 갈구의 목적성을 동반한다. 결핍의 성질은 개인마다 다르다. 따라서 인식의 성향도 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후설이 제시한 개념들은, 가장 일상적인 세계에서 획득되는 삶의 지평, 그 인식의 전제에 관한 것. ‘노에시스’란 각자의 지향성의 범주 내에서 떠오르는 생각의 상태이고, ‘노에마’란 그 생각이 닿고 있는 표상이다. 인식의 대상 그 자체에 닿고 있는 게 아니다. 각자의 관점으로 해석의 이미지를 향해 있는 것이다. 니체 이후의 철학들이, 특히나 현상학 계열들이 ‘시간’이란 키워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혹은 그들 각자는 서로 다른 시간성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같은 공간에서 함께 보고 들은 순간에 대한 해석이 그토록 분분한 것.
우리는 우리에게 의미화가 될 수 있는 기준에 따라 세계를 인식한다. 니체에 말따나 진리도 각자의 미적 취향인 바, 우리 스스로가 이미 진리의 내부에 들어와 살고 있다. 결국 인식이란 것은 각자가 딛고 있는 패러다임과 각자에게 작동하는 메커니즘 안에서의 인식이다. 저마다의 생활체계를 관통하는 시선의 습관, 그 관점대로 각자의 세계를 바라본다.
관점주의가 곧 상대주의와 동의어인 것은 아니다. 상대주의란 ‘~에 대한’ 다름을 존중하는 것이라면, 관점주의는 차이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다. 그럼 후설이 그 견해만큼의 진리를 다 존중하자고 말하는 관점주의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견해만큼의 진리가 있다는 건, 누구의 견해도 진리로 확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그 수많은 견해 너머에는 분명 어떤 견해도 투영하지 않은 사실이 존재할 것이다. 때문에 후기의 후설은 다소 보편주의로 흐른다. 하여 잠정적인 판단에 신중을 기하는 ‘에포케(판단중지)’가 오히려 그를 대변하는 키워드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