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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 현기증 - 영화 <영웅본색> 중에서

실존주의

by 철학으로의 초대

정의를 수호하는 경찰이 되기까지, 자신을 애지중지 키워왔던 형. 그러나 경찰이 되어 알게 된 사실은, 그 동안에 있었던 형의 범법 기록과 그 검은 돈으로 경찰이 된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이 역설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지는 형제의 인연과 깊어지는 감정의 골은, 주윤발의 이마를 관통한 총알 앞에서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그들의 손에는 총이 쥐어져 있었다.


부하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조직의 중간보스, 범법의 중심에서 사필귀정을 외치는 모순은, 법을 수호하는 경찰에게는 이해될 수 없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질서 속에서 해결되는 모든 것, 그것을 정의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동생은 '현기증'을 느낀다.


과연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올바른 것인가의 문제,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경찰에게 자수를 하러 걸어가는 저 배신자를 법의 심판대에 올리는 것이 과연 올바른 정의인가? 열혈의 경찰이 선택한 올바름은 윤리를 벗어난 신앙이었다. 내면의 목소리, 자신의 진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정의라고 믿는 것. 장국영의 주체적 결단은 적룡에게 총을 건넨다.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영웅본색>에 한정할 수 없을 정도로, 이런 윤리적 갈등을 다루는 영화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우리 삶의 도처에 더 많이 널려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약자는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라는 희망으로 법에 기대지만, 정의의 문헌이라는 법조차도 약자의 편이 아닐 때가 있다.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강자들에 의해 쓰여졌고, 법과 윤리가 그 역사의 한 표현일 때도 있다. '법대로 해라!'의 자신감은 결백이 아닌 권력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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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명령에, '신앙의 기사' 아브라함은 갈등한다. 자신의 아들을 죽이라는 저 음성이 과연 신의 것일까? 혹 악마의 유혹은 아닐까? 자신이 미친 것은 아닐까? 갈등과 함께 다가온 '현기증'에 구토가 날 지경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이삭을 돌려받을 것이란 믿음으로, 손에 쥔 칼은 이삭의 심장을 향해 내리꽂으려는 찰나, 멈추라는 신의 음성이 들려온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시험에서 벗어난다.


키에르케고르의 해석을 오늘날의 상식으로 살해와 신에게 천착할 필요는 없다. 당대 기독교 사회의 비상식과 부조리를 감안한다면, 방점은 신의 시험이 아니라 우리가 보편적 당위로 믿고 사는 도덕과 윤리 체계에 대한 물음이다. 그 대답을 반인륜적 성령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나 또한 '올바름'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브라함은 칼을 빼들었고, 곧 멈추었다. 장국영은 총을 빼들었고,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두가 자신들이 선택한 주체적 '올바름'이었다. 그 올바름은 자신이 딛고 있는 도덕과 윤리의 관계망 너머에 존재하는, '단독자'로서의 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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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성숙도를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단계로 나눈다. 심미적 단계는 선택과 책임에 대한 두려움을 회피하며 오로지 순간만을 즐기려 하는 인간상이다. 윤리적 단계의 인간은 관계 속에서 보편적 원칙과의 균형을 유지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한 선택을 반복하다. 종교적 단계의 도덕적 갈등을 넘어서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신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의 신앙적 몰입이다.


이는 사회학적 분류라기 보단 키에르케고르 자신이 삶으로 겪어낸 경험에 기반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주제는 이런 개인적 실존이다. 그렇다고 키에르케고르가 법의 테두리 너머에서 개인적으로 심판하라고 주장하는 것이겠는가. 다만 부당하게 강요되고 권고되는 그 도덕과 윤리의 실체를 돌아보라는 것.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은 교조주의와 관료주의로 변질된 당대 기독교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미 도덕과 윤리의 체계 자체가 도덕적이지 않고 윤리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올바름을 판단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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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에 기초하든, 성선에 기초하든, 도덕과 윤리는 사회의 질서를 위해서 지금까지 존속하는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그것이 과연 절대적 올바름인가에 대한 갈등으로 일으키는 '현기증'이다. 우리에게 보편으로 강요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한 번 쯤 '구토'를 내뱉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현기증은 그런 각성의 증상을 상징한다.


정의라고 일컬어지는 '법'마저도 우리의 편이 아닐 때가 있다.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약자들의 착각이 법의 그물망을 더욱 촘촘히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서민들의 삶을 지켜주는 최후의 안전장치가, 서민들의 실존적 입장에서 발의되는 것일까? 법이 어떤 계층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시민 개개인의 각성 그리고 현기증, 그로 인해 쏟아져 나오는 토사물을 뒤집어쓰지 않는 한, 부조리한 체계는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키에르케고르가 자신이 살아가던 '현대'에 물었던, 지금을 현대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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