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는 진화의 시작이다
신의 죽음을 말하는 니체의 철학 기저에 자리한 신이 있으니 바로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적’이라는 용어는 그의 첫 저작인 <비극은 탄생>에서부터 등장하는, ‘우연’과 ‘긍정’, 그리고 ‘파괴’와 ‘생성’의 슬로건이다.
올림포스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유일하게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신으로, 질투에 눈이 먼 헤라의 계략에 육신이 갈기갈기 찢겨졌다가 다시 제우스에 의해 부활한다. 그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었던 가해자들이 타이탄족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타이탄족은 거대한 자연의 힘을 상징한다. 올림푸스의 신들은 이 거인족들에게서 태어난다. 제우스의 아버지가 바로 타이탄의 수장이었다. 거인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제우스는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일부(프로메테우스 같은)를 제외하고는 모든 타이탄을 저승에 가둔다.
이 서사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인간의 상식으로 우연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인식의 한계에 부딪히면, 결국엔 신을 만나게 된다.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인간의 삶을 중재하는 존재, 결국 신은 인간의 지평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우연에 대해 인간의 지평으로 내놓은 대답이기도 하다.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기도 했던 디오니소스는, 뜻하지 않은 우연으로 파괴되었다가 삶의 의지로 부활하는 필연의 존재, 다시 말해 삶의 우연성을 헤쳐 나가는 인간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술의 신으로 불리는 그는,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만드는 법을 인간에게 가르쳐 줬다고 전해진다. 당연히 그의 상징은 포도. 죽음에서 부활을 한 신은 늘상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그리스인들에게 이 스토리텔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술이 되기 위해서 포도는 짓이겨져야 한다. 열매는 무엇인가에 의해 부수어져야 다시 열매가 될 수 있다. 파괴의 고통은 스스로를 다시 태어 나게 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산고다.
죽음에 직면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게 삶은 더욱 값지고 절실한 시간들이다. 어쩌면 그전까지의 자신은 죽은 것인지도 모른다. 차라투스트라의 경멸과 몰락 또한 그런 의미였다. 부처의 고행과 그리스도의 광야가 또한 그런 의미다. 이전까지의 자신을 파괴해야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파괴와 생성, 고통과 환희가 뒤섞인 모순으로의 의지다. 신이면서도 인간인 존재, 정신병이 심해진 말년의 니체는 자신이 그의 부활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들의 의지와 우리들의 목적들을 갖고 있는 우리 영리한 난쟁이들은 바보 같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연이라는 거인에 의해 괴롭힘을 당한다. 우리들은 기둥처럼 높이 쌓인 무더기 위로 서로 발악을 하며 질주해 보지만 그 와중에 서로에게 짓밟혀 죽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시무시한 한 편의 시와 같은 이런 이웃 없이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 거인이라는 괴물은 목적들로 짜여진 거미줄 속에 있는 삶이 우리에게 너무 지겹게 느껴지거나 혹은 너무 두렵게 느껴질 때 어김없이, 그리고 너무도 자주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괴물은 자신의 손으로 이 거미줄 전체를 찢어 버림으로써, 그것도 그 손이 이 엄청난 비이성적인 짓들을 원하지는 않았다는 듯이 태연하게 일종의 숭고한 기분전환을 즐긴다. - <아침놀> 중에서 -
이 글에서 비판의 대상은 난쟁이인 것일까? 거인인 것일까? 니체의 글들은 걸러서 읽을 필요가 있다. 조소를 감추고 동조의 뉘앙스로 비아냥대는 걸 직설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자신이 지나온 시간의 데이터로, 다가올 미지의 것들을 같은 결의 방향성으로 예측하는 습성을 누구나 지니고 있다. 인생이란 게 늘상 똑같은 반복의 연속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반복은 인생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늘상 같은 걸 입력하면, 같은 산출값인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과연 당연할까? 변하지 않을 거라 믿는 가치들을 안정으로 끌어안고 살아도, 때로 전혀 계산에 없었던 의외의 변수로 무너지는 삶이기도 하기에….
난쟁이는 ‘중력’에 의해 키가 작아진 군상들을 의미한다. 관성과 타성의 힘에 사로잡혀 있는 편협한 사유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거인은 간혹 그 신념의 바깥에서 들이닥치는 우연성이다. 거인들은 예고 없이, 느닷없이, 난데없이, 어이없이 찾아온다. 난쟁이들은 이 거인에게 짓밟힌다. 즉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우연의 현상들을 가탁한 대상이 바로 거인이다.
이 우연 앞에서, 그 우연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변해야 한다. 자의적인 변화란 쉽지 않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 대한 신념 체계를 벗어던지는 일이기에…. 성격에 따라서는 아예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변화를 해야 하는 상황은, 차라리 우연에 시달리며 허덕이고 있을 때다. 고수하고 있는 체계로는 대응이 어렵다. 그런데 막상 변해 보면 그 체계도 꽤나 괜찮은, 이전까지의 고루함과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신선한 해법이기도 하다.
니체의 말처럼, 우연적 ‘이웃’도 끌어안을 때 지평도 넓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성적으로 생각해!’란 말의 함의는 실상 이렇다. 본인에게 익숙한 것이 곧 이성적인 것이다. 그 이성적 판단 바깥에서 비이성적으로 발견되는 새로운 삶의 체계가 있다. 훗날 돌아보면 어느 상태가 비이성적인 것일까?
타이탄 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은, 아마도 천상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네준 프로메테우스. 인간은 열로 음식을 익혀 먹으면서부터 턱이 작아지고 두뇌가 커지기 시작했단다. 더불어 빛으로 뇌의 활동 시간을 늘려 버렸다. 신화 속의 거인이 우연을 상징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우연히 발견된 불에 의해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니체의 견해에 따르면 불을 건네준 사건은, 신과 같은 정신 능력을 인간에게 선물했다는 의미다.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이 찾아든다. 더 이상 신이 정해 놓은 운명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주체적인 결단으로 헤쳐 나가는 ‘우연’이 열린 것이다. 니체는 이 거인족의 절도를 인류가 최초로 경험한 철학적 문제의식으로 보고 있다. 인간이 자유자재로 불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신의 입장에선 신의 능력을 나누어 가진 신에 대한 모독이기도 했다. 제우스의 심기가 괜찮을 리 없었다.
화가 난 제우스는 판도라로 하여금 프로메테우스가 감추어 두었던 비밀상자를 열게 한다. 결국 문명의 시작과 동시에 욕망의 봉인이 풀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들이 극에 달한 인류는 대홍수와 같은 비애를 책임져야만 했다. 불이 불러일으킨 물이라니, 신화에는 이토록 아이러니하고 논리적이지 않은 인간의 삶에 대한 알레고리들로 가득하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의 인격화였다. 그래서 인간을 질투할 정도로 완벽하지 못했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많은 신들이 있었던 것이고…. 당시 인류의 지평으로는 이해되지 않던 영역들은 그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하면 다 해명되는 일이었다. 천둥이 치는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시대의 북유럽 사람들에겐 토르의 권능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가장 합리적이었을 테니까.
유럽의 정신문화를 이루는 두 근간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다. 이스라엘과 가장 변별되는 그리스의 특징은 인본주의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존재는,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투영이다. 즉 신에게 가탁한 인간 스스로의 대답이었다. 때문에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에 관한 대답으로서의 신들까지 존재하며, 신들 역시 사랑하고 질투하며 분노하고 좌절하는 존재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의 조력자이기도 한 동시에 훼방꾼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영예가 신의 뜻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모든 과오 역시 신의 탓이다. 헤브라이즘이 원죄를 인간에게 짊어지게 했다면, 헬레니즘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죄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은 신의 결정에 굴복하지 않는다. 운명이 실현되는 순간까지 그 운명에 맞서 싸운다.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비참한 최후일지언정, 마지막까지 주체적인 결단으로 나아간다. 그조차 이미 신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결말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신의 문법을 이해할 수 없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가 사력을 다해 가닿는 지점까지가 내게 정해진 운명이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이유 역시 그런 인본주의적 성격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