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의 철학
키에르케고르가 정의하는 ‘실존’은 ‘확장’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자신을 둘러싼 조건들로 인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담론이다. 하이데거의 저서 <존재와 시간>는, 개인이 매개한 시간의 속성이 실존의 조건이라는 주제이다.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은 변화의 가능성을 담지한 채 도래하는 ‘사건’에 대한 해석이다. 레비나스는 그런 '사건'의 기회를 타자가 지닌 ‘타자성’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시간의 속성과 다른 결로 가로놓이는 사건들은 주체에게 다른 미래를 선사한다.
현대철학의 주요 화두인 타자의 개념은 양가적이다. 개인을 동일자로 포섭하는 근거인 동시에, 개인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남들도 다 지닌 명품은 나도 지녀야 하는 동일자적 가치이기도 하면서, 그 남들을 통해 이전까지 모르고 있던 명품의 세계에 눈을 뜨는 것이기도 하니까. 레비나스의 방점은 후자에 찍히며, 타자를 우연의 성질로 설명한다. 나와는 다른 규칙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한, 내가 지닌 잠재성을 일깨워주는 ‘사건’이다. 그것은 내가 고수하는 생활체계 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나의 생활체계를 무너뜨리며 엄습하는 우연들이 가져다주는, 이전과의 '차이'다.
다시 만화 <슬램덩크>를 예를 들어보자면...
지 꼴리는 대로만 살아가던 강백호는, 짝사랑하는 채소연으로 인해 자신이 맞닥뜨린 우연적 사건들에 성실히 임하기 시작한다. 하기 싫은 일도 한다. 과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한 질문 자체를 던져보지 않았던 것들에도 도전해 본다. 그 결과 싸움 말고도 자신이 잘 해낼 수 있는 일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간다.
강백호에게 농구는 그가 한 번도 가능성을 점쳐보지 않았던 영역이었다. 한 동안은, 얼룩져 있는 상처를 도려내고 싶은 과거였다. 그러나 상처받은 그 과거부터 미래가 열린다. 그 매개의 사건이 바로 채소연이었다. 그에 잇대어진 타인들이 서태웅과 송태섭, 채치수와 정대만, 권준호를 비롯한 북산고의 동료 선수들과, 강백호가 넘어서야 했던 상대팀의 모든 선수들이었다. 강백호는 이들을 통하여 성장한다. 즉 강백호의 잠재성을 모든 타인들이 나누어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은 나의 미래다.
기적은 우리가 갈망하는 순간에, 우리가 예상했던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잖아. 하여 그것은 언제나 ‘뜻밖에’ 찾아오는 의외성이다. 인생의 어느 순간이 기적과 연결되어 있는 하이퍼링크인지 알 수 없다. 하여 우리는 매 순간 스쳐가는 우연과 타자에 성심을 다해야 하는 것. 자신과 맞지 않는 결이라 하여 다가온 우연들을 귀찮아하지 말 것.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 하여,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지 말 것. 오른손잡이에게도 왼손이 거들어야 할 순간들은 찾아오기 마련이니, 왼손의 담론을 무심히 지나치지 말 것. 벤야민의 어록을 빌리자면, 모든 결정타는 왼손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