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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약수(上善若水) - 흐르는 강물처럼

노자, <도덕경>

by 철학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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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슴푸레해진 계곡에 홀로 있을 때면, 모든 존재가 내 영혼과 기억, 그리고 강의 소리, 4박자의 리듬, 고기가 물리길 바라는 희망과 함께 모두 하나의 존재로 어렴풋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결국 하나로 녹아든다. 그리고 강이 그것을 통해 흐른다. 강은 대홍수로부터서 생겨나서 태초의 시간부터 바위 위를 흘러간다. 어떤 바위 위에는 영겁의 빗방울이 머물고, 바위들 밑에는 말씀이 있고, 말씀의 일부는 그들의 것이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엔딩을 장식하는 주인공의 내레이션이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플라잉피쉬가 있다. 유년, 청년,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강물에 드리우는 낚싯줄, 그 인장력이 버텨낼 수 없는 세월의 유속으로 얽히고설키는 가족의 사랑과 갈등.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떠나보내고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자신의 결정적 순간들이 모여 있는 강물로부터 이제 인생의 회한을 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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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부터 저렇게 흐르고 있었을 강물, 그 기나긴 흐름의 잠깐을 빌려 헤엄치는 물고기와 그 물고기를 낚는 사람. 영원을 담고 이어지는 흐름의 한 자리를 빌려 잠시 살다가는 인생, 그 잠시 속에도 기억으로 낚아 평생을 추억하는 소중한 순간들. 그러나 강물은 우리가 구태여 그 의미를 헤아리지 않는 無까지도 안고 흐르고 있었다. 태초의 ‘말씀’으로 생겨난 그 자신이면서, 말씀으로 생겨난 생명들을 존재케 하는 ‘흐름’이기도 하다. ‘흐름’은 순간을 낚는 모든 것들의 세월을 낚은 채로 변함없이 모든 자리에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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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에게서나 노자에게서나 道의 전제는 규정된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무엇이다.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아무 것도 영원할 수는 없다. 변한다는 사실 하나만이 변하지 않을 뿐이다. 이런 역동적 道에 관한 정의는 <주역>에서부터 밝히고 있다.


一陰一陽之謂道

음이 되었다가, 양이 되는 것을 일러 道라고 한다.


물은 이런 道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물질이다. 시간은 흐른다. 물 역시 흐른다. 물은 시간의 흐름을 공간으로 채우고 있는 형상이다. 자연현상의 근원에는 물의 순환이 있다. 대기를 만들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고, 강과 바다가 되고, 다시 하늘이 되고…. 그 순환의 공간을 빌려 생명들이 자라난다. 그렇듯 동양적 사유에서의 시간 개념은 직선적이지 않을 뿐더러, 공간과 확연히 구분되는 경계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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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 속에 깃들어 있는 물은, 노자에게선 곧 신의 속성이기도 하다. 道法自然,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했으니, ‘성령’이란 자연을 이고 흐르는 물의 속성과 다르지 않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래서 道에 가깝다.


다투지 않는다는 말은 한 곳에 고여 점유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뒤이어 오는 것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흘러갈 뿐, 진리의 지위를 고집하지 않는다.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이란 낮은 곳이다. 물은 높은 곳에 머물지 않는다. 모든 생명을 관장하면서도 주재자란 자의식으로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취하며 자라나는 생명의 곁을 흘러갈 뿐이다. 노자는 성인(聖人) 역시 이런 자연성에 부합하는 존재여야 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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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칭송한 성현은 노자뿐만이 아니다. 춘추전국의 빅4 모두가 물을 칭송하는 구절들을 남겼을 정도로, 동양사상에서는 중요한 메타포다. 둔덕과 둔덕 사이를 흐르면서 양쪽 둔덕의 생태에 영향을 미치는, ‘사이’를 ‘관계’로 채우는, 물질화 된 정신이다. 물길은 늘 일정하지가 않다. 때론 쌓고 때론 깎아낸다. 유속과 유량도 물길 곳곳에서 다르다. 또한 물길에 따라 유속과 유량이 변하기도 하고, 반대로 유속과 유동량에 따라 물길이 변하기도 한다. 성현들은 이런 역동의 알레고리를 道의 구현에 빗댄 것이다.


<맹자>에는 군자의 道와 德으로 비유한 구절이 있다.


觀水有術 必觀其瀾 日月有明 容光必照焉

물을 보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여울목을 봐야 한다. 해와 달이 밝음에 그 빛을 받아들이는 곳은 반드시 비춘다.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흐르는 물은 구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군자는 道에 뜻을 둠에, 내공이 쌓이지 않으면 통달할 수 없는 것이다.


물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구덩이가 있으면 모두 채우고 나아간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은 세상 모든 곳을 비추는 달의 은혜와 더불어, 세상 곳곳에서 달빛을 담아내는 물의 은혜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물은 구덩이를 채워야만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은 헛된 기다림의 시간이 아닌 성숙의 과정이다. 구덩이가 클수록 채워지는 시간도 오래 걸릴 테지만, 그 물의 양에 기대어 살아가는 생명들도 많아진다. 구덩이를 다 채우고 난 후에는, 높이가 되고자 올라서지 않고 더 아래에 자리한 보다 넓은 구덩이인 바다를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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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은유는 관용과 겸허에 관한 것이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계곡들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낮은 곳에 처하기를 잘하기 때문이다.


강과 바다는 모든 물줄기를 차별 없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깊이는 깊고 그 색은 짙다. 생명은 그들을 기준으로 모여들고, 사람 역시 이곳에 모여 문명을 만들었다. 가장 낮은 곳에 있기에 지혜롭고, 가장 낮은 곳에 있기에 넓고 깊으며, 가장 낮은 곳에 있기에 생명들이 모인다. 크고 넓은 虛를 지니고 있기에 많은 것을 채울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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