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료, 형상, 목적인, 동력인
‘천문학이라는 과학을 통째로 뒤엎어 놓으려는 바보’
종교의 부조리를 성토하며 개혁에 앞장섰던, 나름 시대의 진보였던 마르틴 루터가 쏟아낸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조롱이다. 루터의 근거는 당대의 절대진리였던 『성서』다. ‘전환’의 대명사인 코페르니쿠스였지만, 그는 태양을 돌고 있는 행성들의 궤도가 원모양이라는 전제를 버리지 못했다. 그 근거는 신이 내린 완벽한 기하학 도형이 원이라는 믿음이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을 폄하했던 루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다.
『코스모스』의 저자인 칼 세이건은 코페르니쿠스를 점성술과 천문학 사이에 존재했던 마지막이자 최초라고 표현한다. 아직까지도 과학이 종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코페르니쿠스가 맹신했던 신과 원의 상관관계는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비과학적 전제는 플라톤의 이데아까지 소급해야 하는 기원이다.
이데아는 신의 완벽성을 전제로 한다. 감각기관으로 감지하는 현실은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 완벽의 성질은 완벽의 존재들에게만 가능하다. 신이 존재하는 내세가 바로 플라톤의 지향점이었다. 하여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육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자유로 간주했고, 플라톤은 인간이 죽어서 이데아의 세계를 경험하고 난 뒤, 다시 다른 육신으로 윤회를 한다고 믿었다. 인도철학은 서양적 사고로 분류된다. 윤회의 담론도 인도의 전유물은 아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윤회의 순간에 우리는 내세에서 경험한 이데아를 잊어버리게 된다. 삶의 시간 내내 그 잃어버린 이데아를 ‘상기’해내려는 지적 본능이 이성이며, 그 도구가 철학이다. 지식에 대한 에로스적 가치, ‘플로토닉 러브’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데아가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하는 것이 ‘변화’의 현상이었다. 만물의 현상은 그 이데아의 반영이다. 삶과 죽음이야 윤회로 설명이 된다손 쳐도, 육체의 성장과 노화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만물의 생성과 소멸은 이데아의 생성과 소멸이 반영되는 것인가? 완벽성으로 설정한 이데아에 ‘변화’의 지분이 허락되는 것은, 그 자체로 완벽을 부정하는 모순이다. 이 괴리의 지점으로부터 ‘질료’와 ‘형상’의 역습이 시작된다.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력’과 ‘목적’의 요인을 제기한다. 질료를 형상으로 존재케 하는 근원적 힘은 신으로부터 나오고, 그 존재목적 역시 신이다. 프로메테우스 신화로 받아보자. 프로메테우스가 흙을 질료로 인간의 형상을 빚은 사건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동력인’에 해당한다. 인간의 형상에 숨결을 불어넣어준 제우스는 ‘목적인’이 된다. 이 장면을 기독교의 창세기로 옮기면 동력인과 목적인이 일치한다. 여기서 신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신이 인간의 목적이란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의 생노병사는 다시 신에게로 회귀하기 위한 목적성으로 흘러가는 ‘변화’다. 자연의 변화 역시 신을 목적으로 한 생성과 소멸이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논리적 전개이지만, 딱히 논리적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다.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당대를 풍미한 어떤 천재도 그가 처한 역사적 조건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무슨 말을 하기에 앞서 항상 제우스에게 맹세를 하던, 철학이 아직 신화에서 분리되지 않은 시절의 천재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스콜라 시대의 근간이 된다. ‘schola’에서 ‘school’이란 말이 유래되었을 만큼, 수도원을 모태로 하는 단과대 개념이 이때 생겨났고, 과학적 사고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목적인을 설정한 이유도 단순한 신앙의 차원이 아니었다. 신이 창조한 세계를 과학적으로 증명해내고자 했던 시도였으며, 매개로 삼은 원리 중 하나가 바로 중력이었다. 중력이라는 개념은 뉴턴의 사과로 발견된 것이 아니다. 뉴턴의 과학사적 의의는 지상에서의 중력으로 천상을 해석해냈다는 점일 뿐, 중력 개념은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존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중력으로부터 목적인을 추출하기에 이른다.
세계는 변화를 전제한다. 이는 시간의 패러다임이다. 공간적 좌표의 변화는 운동을 의미한다. 변화의 목적인은 신이다. 운동의 목적인 역시 신이다. 신은 완벽의 존재이기에 변화와 운동을 전제하지 않는다. 만물의 변화와 운동을 자신에게로 귀결시키는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만물을 움직이게 하며,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만물은 변하게 한다.
지구의 중력 안에서 모든 것들은 지상으로 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로 추락하지 않은 천체들의 운동을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이해한 것이다. 천체의 궤도는 원의 모양일 수밖에 없다. 이렇듯 우주의 목적인이 지구라는 지극히 지구중심적 가설로부터 천동설은 나름의 합리성을 유지한다. 그 구심점에 누가 있을까? 바로 신이다. 기독교사회가 지동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이유다. 우주의 중심은 신이 보우하는 지구다. 그 지구의 중심은 바티칸이어야 했다.
신의 결과물인 원은 가장 완벽한 도형일 수밖에 없다. 갈릴레오는 물론이고, 케플러조차도 원의 전제를 포기하지 못 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근대까지도 과학이 아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믿음은 케플러에 의해 깨진다. 케플러는 행성들의 궤도 간격에 어떤 수학적 공식이 존재할 것이라는 가설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행성들의 궤도가 타원형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태양에서 먼 행성들일수록 원에 가깝다고 한다.) 케플러도 처음에는 완벽의 도형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관측과 계산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류로 배제되고 있던 결과들로부터 유의미한 상관이 발견된다.
케플러는 기하학의 ‘완벽’을 뒤엎기 위해서 철학을 끌어들인다. 신은 완벽한 세상을 내리셨다면, 이 세상은 왜 전쟁과 질병, 가난과 굶주림 같은 온갖 불행으로 병들고 있을까? 지구는 확실히 완벽과는 거리가 먼 존재다. 그렇다면 다른 행성들도 완벽으로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추리 끝에 도출된 반전은, 신이 내린 완벽으로 믿고 있는 것들이 실상 인간들의 자의적 오류일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신에게 있어, 원은 타원보다 완벽한 도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