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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 철학, 불안과 생각 - 들뢰즈, 리좀

니체, 키에르케고르, 차이와 반복

by 철학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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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음 앞에 내던져진 순간은 나의 데데한 문제해결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너무도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 하나만을 알게 되는, 언제고 느껴본 막막함만이 다시 익숙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실상 낯설음의 정체가 ‘모름’이기도 하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겠으며, 언제쯤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를 모르겠는…. 그러나 문제해결력의 빈곤함이 드러났다는 것은, 개선의 가능성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각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존철학은 불확정적 우연이 가져다주는 각성의 잠재성을 ‘불안’으로부터 발견한다. 데카르트의 주장대로 우리가 과연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존재들일까? 데카르트에 대한 반론들의 요지는, 그저 의식이 있는 상태와 생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의 정신활동은 다른 양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일상의 많은 순간들을 그저 자신이 겪어온 시간의 관성대로 지나친다. 그 관성이 멈추는 지점이 바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이며,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에 불안도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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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 계기는,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가로놓이는 우연적 사건이다. 관성대로 흘러오다 맞닥뜨린 인과이면서도, 그 관성으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이율배반. 그 모순 앞에서 느끼는 불안으로 인해, 비로소 스스로에게 반성의 기회를 허락한다. 이는 헤겔의 변증법이 설명하는 반(反)의 작용이지만, 헤겔을 비판하는 철학자들의 주요 논지는, 정작 바뀌어야 할 근간은 절대로 바뀌지 않고 주변부만이 반성을 거듭하는데도, 그것을 발전으로 간주하는 서사에 대한 지적이다. 마치 잔챙이들만 꼬리 자르기 식으로 쳐내는 부조리한 조직이, 연일 쏟아내는 반성의 캐치프레이즈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관성에 대한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의 반론은 ‘차이’와 ‘반복’이라는 단어로 집약할 수 있다. 관건은 반성의 이전과 이후에 공통적으로 남아 있는 가치가 아니라, 반성을 통해 새로이 획득하게 되는 ‘차이’의 가치다. 발전이란 지금 여기에 부재한 ‘차이’로 이끌려가는 ‘반복’의 서사다. 따라서 그 차이를 향한 방향성에 방해가 되는 것들이라면 과감히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비록 자신 존재감을 확보해주는 것들일지라도 말이다. 실상 발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정체성이란 명목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하여 헤겔의 반론들이 제안하는 발전의 방법론은 개선과 절충이 아니다. 우연 앞에 홀로 서는 ‘단절’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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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의 철학자 들뢰즈가 사유 모델에서 중심 줄기를 없앤 이유는, 개인을 옭아매는 지배담론에 대한 반동이다. 이 반동으로부터 비롯된 모델이 뿌리줄기의 이미지를 빌린 ‘리좀(Rhizome)’이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특정 신념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 상황마다의 맥락에 대처할 수 있을 만큼의 탄력성을 지닌 사유방식이다. 따라서 관건은 내가 견지하고 있는 것들이 아니라 외부에서 도래하는 것들이다.


우연은 관성의 안정성을 무너뜨리는 ‘사건’의 모습으로 다가오기에, ‘불안’의 정서와 함께 도래한다. 그러나 우연이 안겨주는 불안 속에서 그 불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생각’이 일어난다. 하이데거는 이 불안의 지점을 ‘존재사건’이라고 명명했다. 생각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와 동력은 나의 체계 바깥에서 도래하는 우연적 사건들이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유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림은 AI로 그린 것. 헤겔을 상징하는 키워드 '미네르바의 부엉이'에서의 미네르바(아테나)가 서울을 여행한다는 컨셉. 헤겔의 비판자였던 들뢰즈의 노마드를 의도한 것인데, 좀 더 디테일할 필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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