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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율곡 - 이기논쟁

맹자, 측은지심

by 철학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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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의 것도 아니고, 내가 상관할 것도 아닌 고통이 마치 나 자신의 것인 양 내게 즉각적인 영향을 끼치며 나로 하여금 행동에 돌입하게 만들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정말이지 신비스러우며 이성조차도 아무런 설명을 해줄 수 없으며, 현실의 경험에서도 전혀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흔히 벌어지며, 모두 그런 경험을 지닌 바 있다.”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성향으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홉스의 입장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난생 처음 본 누군가가 위험에 처한 상황을 보고서 고민할 겨를도 없이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인간의 이타적 심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런 심리상태를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규명한 적이 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라고 해석되는데, 현대적으로 바꾸자면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정도...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모두 깜작 놀라고 불쌍해하는 마음을 가진다.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 함도 아니며, 마을 사람들과 벗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하여 그러는 까닭도 아니며, 매정하다는 원성을 듣기 싫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면 누구나가 다 지니고 있는 선한 본성은, 仁이라는 덕목의 원형이기도 하며(惻隱之心 仁之端也) 성선설의 근거가 된다. 공자 철학의 주요 키워드인 仁과 禮, 후학 중에 맹자는 仁에 무게를 더 실어주었고, 계보가 주자(朱子)로까지 이어진다. 조선조의 이기논쟁은 이 측은지심이 이성에서 연유하는 도덕률이냐 감정에서 연유하는 공감능력이냐의 대립으로부터 발발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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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이르길,

“우주의 법칙이 정신에 알려져 있는 까닭은 그것들이 정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우주의 법칙과 우리의 정신은 동일한 모델이란 이야기. 여기서 ‘우주의 법칙’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理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런 섭리가 인간의 정신에 내재하는 방식이 性이다. 서양철학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연의 이법이 정신으로 내재화 된 경우이기에, 이성은 기본적으로 도덕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그 측은지심이 性이냐 情이냐에 대한 논박이 일었던 것. 오늘날 언어 감각에서의 이성 개념을 적용하면 이해가 쉽지 않은 문제다.


세상 만물은 氣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性은 아직까지 형이상학적 원리이다. 이것이 구체적 현상으로 존재하려면 氣의 도움이 필요하다. 性이 氣로써 존재하는 것이 心이다. 그리고 心이 사물이나 상황에 응하여 발하는 것이 情이다. 만물을 구성하는 氣는 사람마다 사물마다 지닌 그 성질이 다르다. 그래서 그 개별적 차이를 가리켜 ‘기질’이라고 하는 것. 性은 氣로써 존재하기 전의 원형이 理이기 때문에 보편적이다. 情은, 이미 氣로 존재하는 性인 心으로서 외부에 반응하는 것이기에 개성적이다.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와 그 표현 방식이 서로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복잡하다. 도대체 뭐가 어떻다는 것인지. 나도 이거 글로 쓰니까 정리가 되는 거지, 강의하라고 하면 못 한다. 퇴계와 율곡이 이걸 가지고 논쟁을 벌인 거. 우리가 지니고 있는 조선 사대부에 대한 선입견에 가려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조선의 철학은 주자의 후학들도 감탄을 내지른 고도의 관념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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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고봉(기대승)이 먼저 논쟁을 벌였다. 반복하는 이야기이지만, 性은 자연의 이법이 우리 정신에 내재화 된 경우이기에 도덕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퇴계는 측은지심을 순수한 이성의 작용이라고 보았지만, 고봉은 측은지심을 이성과 기질의 역학으로 설명한다. 퇴계는 측은지심 그 자체를 仁으로 간주했다. 仁은 性이다. 그러나 주자도 측은지심을 情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자체로 仁인 것이 아니라, 仁의 단서. 즉 순박한 본성이기는 하지만 아직 인자하고 어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는 단계의 마음이다.


고봉의 철저한 논리에 퇴계가 조금 주춤한다. 그러나 퇴계의 품격은 그 ‘주춤’에서 드러난다. 이미 당대 최고 브랜드로 군림하고 있던 대학자는 젊은 후학의 지평에 찬탄을 쏟아내며, 자신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견지하고 있던 생각에 수정을 가한다.

율곡의 견해로는, 측은지심과 감정은 모두 心속의 氣가 발한 것이다. 그런데 心은 이미 性, 그리고 그보다 근원의 지점인 理를 포함하고 있다. 氣로써 반응하는 것이 情이지만, 그 氣가 반응하게 하는 근원은 理이다. 결국 理가 발하고 氣가 발함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요, 情도 性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된다.


보다 쉽게 '번안'하자면, 이성과 감정의 영역을 무 자르듯 따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담지한 정신의 메카니즘이 감정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는 이야기. 희노애락애요욕, 이 감정의 매뉴얼들이 과연 보편성인가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감정을 느끼는 정도는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에게 슬픔인 것이, 다른 이에게는 별 감흥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 않던가. 그렇듯 감정은 개성적이고 개별적이다. 측은지심은 감정 중에서도 이성에 가까운, 그러나 그 자체로 이성은 아닌 보편적인 공감능력이라는 것.


측은지심은 情의 영역이다. 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측은함 그 자체의 속성은 같을지라도, 느끼는 정도와 표현의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다. 이 막연한 단서가 도덕적 개념으로 명료해진 것이 仁이다. 퇴계는 仁과 측은지심을 모두 보편적 도덕률로 설명했지만, 율곡에게선 仁은 보편적 도덕률이고 측은지심은 사람이면 지니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공감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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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런 복잡한 논의가 왜 중요한가 싶겠지만, 이도 당대의 패러다임 안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던 입장을 이해할 일이다. 푸코가 이런 경우를 일러, '에피스테메'라고 했던 거고...


율곡의 情은 감정의 가치가 해방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양사상에서도 감정은 이성에 비해 저열한 가치였다. 퇴계를 '조선의 주자'라고 부르지 않던가. 퇴계와 궤를 함께 했던 ‘포스트 주자’들에게서도 情은 性보다 저열한 것으로 간주됐다. 그래서 조선조 양반네들이 그토록 절제된 감정으로 살았던 것. 그 과잉과 왜곡이 소위 ‘양반체면’이라는 삶의 양태. 문학에서는 형식미와 절제미를 숭상하는 시(詩)가 오랫동안 문단의 주류를 점하게 된다. 그러나 情의 가치가 재발견 되면서부터 문학 역시 조금 더 감정에 솔직할 수 있게 된다. 체면을 생각하지 않는, 감정을 절제할 필요가 없는, 민초들이 즐겨 읽던 소설이 서서히 문학의 범주로 들어서게 된다. 이런 반주자(反朱子)적 사유로 직접 소설 창작에까지 참여한 사대부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허균과 박지원이다. 그리고 실학의 계보들에게로 이어지니, 실학의 태동을 율곡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다.


퇴계를 이원론으로, 율곡을 일원론으로 설명하는 지식을 학창시절에 배웠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 지식 체계에서의 분류일 뿐, 모두가 心에 대한 일원론적 사고로 보아야 옳단다. 실상 플라톤을 일원론적 이원론으로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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