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철학의 진정성
"가난한 사람, 모든 사람이 다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신은 항상 말이 없는, 그 착한 가난뱅이인 누군가에게 마침내 뭔가를 말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시도해 본 것이다."
"예술에 도달하려면 삶으로의 우회가 필요했다. 예술을 알기 위해서는 우회해야 할 그 무엇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은 삶을 부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예술은 설령 그 예술 자체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으로서라도 삶을 전제로 한다."
많은 문인들이 소외된 계층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실상 소설 속의 처절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쏟아내는 경우인가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소외된 자들의 사유와 화법이라고 하기엔 다소 지성에 대한 강박처럼 느껴지는, 과연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작가 자신의 목소리인지가 애매한 페이지들. 과연 실생활에서 그런 현학적인 문장들로 생각하고 말하는 이들이 있느냐 말이다. 그것이 누군가가 매일같이 마주하는 삶의 한 자락에 대한 표현일까? 아니면 실질적 삶에 서툰 작가들이 쏟아내는 삶과의 괴리감일까? 그런 이유에서라도, 작가는 글에 대한 경험만큼이나 삶에 대한 경험도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긴 것과는 달리, 고생 오지게도 했던, 문학사와 철학사 양쪽에 자신의 키워드를 남긴 지성. 집안은 가난했고, 빈민가의 위생적 조건은 열악했던 터, 각혈을 달고 사는 천재의 전형이기도 했던 카뮈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자신이 일찍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실제로 그를 진단한 의사도 사망 가능성을 넌지시 내비쳤단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직면했던 그 시기가 문학에 관한 소명과 철학의 기조를 정립하는 전기가 되어준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고, 그 자신이 말했던가. 그 절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가게 하고, 되레 거기서부터 다시 지어 올릴 무언가를 찾게 하는 삶의 희망. 카뮈의 주된 주제이기도 한 ‘부조리’ 또한 그가 직접 겪어낸 세월의 효과다. 하여 그의 진정성으로 써 내린 글에는 상투적인 위로와 조언은 없다. 삶이라는 것이 어디 상투적인 다짐만으로, 그처럼 상투적으로 살아지기나 하는 시간이던가. 철학에서 말하는 피투(被投)니 기투(企投)니 하는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전투적이어야 할 순간도 다반사인 우리네 삶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