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처럼 산다.
사형을 언도받은 자신을 찾아와 '구원'의 진리를 늘어놓는 신부가 딱하다. 신부가 말하는 진리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뜬 구름 잡는 듯한, 삼류 형이상학 같은 진리의 추종자는 참 고집스럽기도 하다. 자신은 적어도 신이 내린 모든 것들에 감동할 줄 아는데... 냄새와 소리에 민감하다. 햇살을 구경하는 일, 손끝에 스쳐가는 바람을 느끼는 일이 보다 중요하다.
그를 계도하고자 다가온 신부에게 정녕 구원이 필요했던 것일까? 자신의 존재의미를 해명해 줄 죄가 필요했던 것일까? 물론 카뮈의 소설이 뫼르소의 살인을 미화하려는 의도이기야 하겠는가. 언도된 사형 앞에서, 미리 당겨진 죽음 앞에서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기도 하는, 어떤 의미에선 실존주의자. 그리고 카뮈 저 자신이기도...
카뮈의 철학은 세계에 대한 즉물적 감흥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세계는 플라톤적이지 않다. 다분히 스피노자적이며 궁극엔 니체적이다. 관건은 신체와 감각. 손끝을 스치는 것들을 느껴보는 순간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 이 세계를 말과 글로, 지식으로, 텍스트적으로 인식하는 이들과, 삶으로 직접 만끽하는 이의 존재론적 차이. 그 극간으로부터 다시 쓰여지는 이야기들. 그렇게 열리는 삶을 향한 에로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란, 그런 극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잖아. 이를테면, 소설 같은 사랑을 하고 싶지만, 소설의 주인공처럼은 살지 못 하는 경우. 그 부조리한 극간으로 밀려드는 공허, 그 공허를 밀어내는 대리물을 찾으려는 노력을 잇대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