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위한 고독과 책임
오늘 동료와 대화 중에 자녀에 대한 고민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대충 요약하면
아버지와 사춘기 딸의 관계가 좋지 않은데,
딸이 너무 과하게 아버지에게 퍼붓는다는 것이다.
조금 더 깊게 대화를 해보니,
딸은 최근 진로에 대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서
예술 쪽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분야를 놓은 지가 일 년쯤이나 되어서,
계속해 온 다른 친구들에게 뒤처질까 봐 불안해한다고 한다.
내가 가만 생각해보니
이 학생은 지금 '투사'를 하고 있다.
투사(投射)는 심리적 방어기제 중 하나로 다음과 같다.
자신의 성격, 감정, 행동 따위를 스스로 납득할 수 없거나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
그것을 다른 것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자신은 그렇지 아니하다고 생각하는 일.
또는 그런 방어 기제.
자신을 정당화하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을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불완전한 욕구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게다가 스스로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기 힘들어 남을 깎아내리기까지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행동이나 자아가 보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책에서는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찍이 '에리히 프롬'은 파시즘의 전체주의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자유에는 견디기 어려운 고독과 통렬한 책임이 따른다고 했다.
그 자유의 대가로서 필연적으로,
폐부를 찌르는 고독과 책임의 무게에
몹시 지친 나머지
그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손에 넣은 자유를 내던지고,
나치의 전체주의를 택한다.
특히 나치즘을 지지하는 세력의 중심에
소상공인, 장인, 사무직 근로자들로 이루어진
하층 및 중산계급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러한 자유를 벗어나 권위에 맹종하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에게서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성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하층 및 중산계급 중에서 나치즘을 반기며 맞이한 이들이 자유로부터 도피하기 쉬운 성격이며
자유의 무게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존과 종속을 추구하는 성향임을 밝혔다.
프롬에 의하면 이러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은 권위를 따르기 좋아하는 한편,
스스로 권위를 갖고 싶어 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고 싶어 한다.
한 마디로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첨하고,
아랫사람에게는 거만하게 구는 인간'
이다.
우리 주변에도
자유를 도피하는 사람들이 많다.
모든 선택을 남에게 미루는 사람들
개인의 중요한 대소사를 모두 인터넷에 물어보는 사람들
확인받고 싶어 하는 글들
갑질하는 사람들
내로남불을 뻔뻔하게 행하는 사람들
자신의 선택에 대한 실패에 두려움을 갖고 사는 건 아닌지.
남이 결정해 준 것이면 마음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 잘 나가면 너무 배 아파서 티가 나지는 않는지.
정말로 시스템이나 조직에 속박되지 않고 더없이 자유로워지면 행복할까?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대다수는 아직 자유가 요구하는 책임에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런 분들은
직업이 대대로 세습되고 신분이 정해져 있던 중세 같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그런 사회가 더 마음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반면에
오히려 자유가 요구하는 고독과 책임을 꿋꿋이 받아들이면서,
더욱 나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정신력과 지식을 갈고닦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생각으로 자아를 가꾸어 나가는 삶이야 말로
자유를 진정으로 누릴 수 있는 삶이다.
내 삶의 주인은 '나'이며
나의 수많은 선택과 결정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선택과 결정들이 모두 자신이 선택했음을 결코 부정하지 않고
그 힘든 고독과 통렬한 책임에 직면하여 극복하고 이겨내야 한다.
현재의 실패에 세상을 탓하고,
주변을 탓하며,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가 남는다.
내 실패에 대한 직면은 정말 어렵다.
그렇지만 직시해야 다음번에 실패하지 않는다.
내 선택에 대한 고독과 통렬한 책임은 나를 성장 시킨다.
오히려 나중에 감사해야 한다.
그 당시의 결핍과 실패에.
이 모든
선택지는 다양하고
그 선택도 물론 스스로 하는 것이다.
책임지기 싫다고 남 탓하지 말고,
자유를 택하고 주인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