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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넷 Feb 05. 2024

술을 좋아하지만 모든 술자리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사회 세련된 음주문화의 정착을 기원하며…

 매주 한 편의 글을 쓰자고 마음먹었지만, 지난주는 도저히 쓰고 싶은 글의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글쓰기와 나 사이에는 우주에서의 작용 반작용 법칙이 존재하는 것처럼 한번 상충하고 나면 끊임없이 멀어진다. 글 쓰는 습관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서 우리 둘 사이를 이어주는 외줄을 끌어당겨야 했는데, 멀어지는 것은 항상 순식간이다. 이번주도 글 쓰는 습관과 나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멀어져 가고 있었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일상을 표류하고 있었다. 그때 브런치로부터 신호가 왔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여기는 브런치. 글쓰기는 운동과 같아서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근육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 응답하라 오버“

 브런치로부터 온 다급한 신호에 다시 한번 글쓰기와 나 사이에 연결된 허리끈을 부여잡고 있는 힘껏 끌어당긴다.

 사실 그간 글쓰기의 물고를 트지 못한 데에는 술이 차지하는 바가 컸다. 우리 회사는 적어도 주에 두 번씩은 남직원들만의 술자리가 있다. 공식적으로 모든 남직원이 참석할 것을 명문화한다거나 종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참의 빈도가 잦아질 경우 직원들 간 화합의 장에 참여하지 않은 대가로 부정적인 평판들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MZ론의 등판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20대까지만 해도 나 스스로를 애주가라고 생각했다. 그 기준에는 남들에 뒤처지지 않는 평균 주량도 포함되었지만, 무엇보다 나는 술자리를 사랑했다.  20대의 술자리는 새로운 만남의 장이자 무용한 대화들의 향연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의 미명하에 어떤 날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가 되어 자본주의를 서비스 꽁치구이마냥 씹어 뜯다가도, 어떤 날은 유럽 배낭여행 경험담이나 늘어놓는 세상 모든 게 아름다운 20대의 모습이었다. 이처럼 술자리 상대에 따라 공작새처럼 변하는 내 모습은 술자리를 생물처럼 매혹적인 형태로 발전시켜 나갔기에 그 시절 모든 술자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요즘엔 술자리가 싫어졌다. 일주일에 두 번은 회사 사람들과 같은 이야기로 술을 마신다. 한국의 술문화 특성상 동석자들과 매번 술잔을 부딪히며 같은 속도로 같은 양을 마셔야 한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술잔 부딪히는 속도가 왜 이리 빠른지 저녁 여덟 시도 되기 전에 대부분 만취 상태로 귀가한다. 5년을 반복하다 보니 회사 사람들과의 술자리가 없는 날에도 다른 술 약속을 잡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의 술자리가 싫어서가 아니라 몸이 축날 것 같아서….) 그러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다양한 주제의 대화가 내 인생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나는 왜 술 없이 맨 정신에 하루 종일 떠들 수 있는 유쾌한 에너지가 결여되어 있을까? 우리 회사사람들은 목적과 재미와 깨달음이 없는 술자리를 왜 매일같이 반복할까? 이러한 의문에 불현듯 우리 세대의 보편적 성장 과정을 떠올려봤다. 학창 시절 우리는 평생 써먹을 수 있는 스포츠나 악기, 오락 등을 배우지 못했다. 사람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교에 대한 가치 평가가 유독 절하되었 던 것 같다. 오로지 대학만을 목표로 끓어 넘치는 10대의 에너지를 냄비 뚜껑 얹듯 억누르며 살다 보니, 20대가 되어 냄비 뚜껑이 열렸을 때 넘치는 열기를 어디에 분출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반대급부로 어른들이 가장 억압하던 술을 찾게 되었고,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을 익혀나갈 기회를 잃은 채 술게임에만 몰두해야 했다. 한창 술맛을 알아 갈 때쯤 우린 군대라는 수용소에 끌려가야 했고, 또 한 번 혈기왕성한 시절을 냄비 뚜껑 아래 억눌리며 살아가야 했다. 제대 후 다시 한번 트인 숨통은 얼마가지 않아 취업 준비를 위해 틀어 막혀 버렸고, 그렇게 우린 어떻게 이 에너지를 분출해야 하는지 끝끝내 배우지 못하고, 술만 마시다가 직장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20대의 기억은 관성이 되어 퇴근 후 주체할 수 없는 헛헛한 마음 역시 술로 채우고, 종국에는 내가 술을 마시는 이유마저 잊은 채 행동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모두가 이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에 우리는 술에 대해 너무나도 관대하다. 술로 인해 얻게 된 당뇨, 지방간, 통풍, 고지혈증 등의 온갖 질병을 전리품처럼 이야기하고, 술에 취해했던 실수들을 한낱 에피소드로 웃고 넘긴다. 마약에 대한 경각심이 경종을 울리는 요즘, 블랙아웃을 일으키는 술에 의한 위험성이 마약보다 덜하진 않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소주 또한 폭음이 만연하는 한국 사회의 큰 원흉이라 생각한다. 세상 어느 나라의 독주가 인당 1회 기본 두 병씩 소비가 된단 말인가. 이건 소주가 저렴해서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소주가 병당 4~5만 원에 판매되어도 우린 이렇게 폭음을 할 수 있을까. 차라리 감미료 덩어리인 싸구려 희석식 소주를 깡그리 없애고, 증류식 정통 소주만 세상에 남았으면 좋겠다. 그럼 음주는 술을 즐길 줄 아는 매니아들만을 위한 호화 취미가 될 텐데…

 여전히 술을 좋아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시는 술은 나의 모든 창의적 활동에 영감이 된다. 하지만 술을 마셔야만 친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촌스럽다. 기계적인 음주에 길들여질수록 내 감수성이 소멸되어 가는 기분이다. 술의 힘에 숨어 평소엔 하지도 못할 말과 행동을 하지 말고, (약간의 고해성사 포함) 술을 술로써 즐기는 세련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이가 들 수록, 알아서 적당히들 혼술 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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