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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insing May 26. 2018

'인디언 써머'의 의미

#09. 영화 '마션'과 '캐스트 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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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인지 여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온화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어 나다니기에는 참 좋은데 이런 날씨의 특징 상 대기의 공기가 맑지 못하다. 


북미에서는 '인디언 써머', 슬라브권에서는 '늙은 여인네들의 여름'이라고 불리는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기온이 높아서 뭔가 이득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날씨는 온화하고 다니기도 편안하다.


지하철을 타고 종각역을 지난다.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우르르 지하철 안으로 들어온다. 


어디서 산 지 모를 가전제품 박스를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지하철 안에 자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아 왁자지껄 떠든다. 


옆사람들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들의 세계에 빠진 것 같다. 


종로 3가를 지날 무렵 문득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한다면 한국인에 대한 인상이 조금은 좋아지려나? 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건넨다. 


"칭, 쭈어 (请座, 여기 앉으시죠.)" 


자신들이 떠들고 있었는데도 이리 선선히 자리를 양보하는 한 사람의 한국인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며 한 아주머니가 그 자리에 앉으신다. 나는 그다음 역인 을지로 3가에서 내렸다. 

▼ 영화 마션 (Martian, '15년작)을 보면서 요즘의 따뜻한 가을날이 생각나고, 지하철에서 만난 약간은 무례한 중국인들이 생각난 이유를 나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아마도 영화 마션에서 내가 받아들인 키워드들이 영화를 보기 하루 전에 경험했던 따뜻한 가을날의 기온과 어떤 중국인들과의 만남으로 설명이 가능했다면 약간은 앞뒤가 맞을는지 모르겠다. 

영화 마션은 우주에 대한 심각하고도 준엄한 이야기를 한 개인의 우수함을 통해 심각하지도 준엄하지도 않은 이야기로 만들어 풀어나간 작품이었다. 


나는 우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지만 영화에서 묘사된 '화성'이라는 공간은 우선 매우 먼 곳이고, 매우 고독한 곳이다. 


그러니까 지구와 화성 간에 통신이 있다는 가정 아래 지구에서 보낸 메시지가 화성에 다다르는데 걸리는 시간은 12 광분이다. 


그러니 지구에서 보낸 메시지를 화성에서 확인하고, 받은 메시지에 대해 지체 없이 답을 한 경우 걸리는 시간은 총 24분이라는 계산이 된다. 


게다가 지구에서 화성까지 가려면 대략 9개월이라는 시간이 소요된다. 

위에 열거한 아주 간단한 데이터만으로도 어떤 사람이 화성에 홀로 남겨진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충분한 물과 식량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그가 다시 지구로 귀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러면서 생각한다. '어디서 많이 본 영화인데?' 어디서 많이 본 영화, '캐스트 어웨이 (2000년작)'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인공 척 놀랜드 (톰 행크스 분)는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서 약 4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점점 무인도 생활에 적응을 하는 주인공과 기회만 되면 탈출을 감행하는 그를 보면서 사실 내가 겪은 일도 아닌 그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인 양 몰입이 돼서 본 기억이 난다. 


아직도 그가 이동식 화장실 문을 이용해서 뗏목을 만들어 섬에서 탈출을 성공한 후 그의 친구이자 배구공인 '미스터 윌슨'을 바다에 놓치고는 죽을힘을 다해 그것을 건져내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는 울며 미안하다고 하는 주인공 척의 절규가 생생하다. 

▼ 사실 두 영화 속의 주인공은 모두 매우 절박하다. 


한 사람은 지구에, 한 사람은 화성에 있지만 둘 다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둘 다 두뇌가 명석한 사람들이다. 어떻게 하면 지금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는 생각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사실 어느 날 척이 해변에서 발견한 이동식 화장실 문을 계기로 척은 다시 한번 탈출을 시도하게 됐고, 마션의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 분)도 경작할 수 있는 어떤 식물이 있다는 사실을 계기로 잘 하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살다 보면 누구나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국면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대개 그런 국면에 빠진 사람들은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쉽게 그런 국면에서 빠져나오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국면 속에 갇혀 탈출하지 못하고 계속 허탕만 치는 사람도 있다. 


사실 탈출을 하지 못하고 계속 허탕만 치는 사람들이 느껴야 하는 좌절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그런 좌절감 때문에 나쁜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는데도 그것을 기회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조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섣부른 좌절감은 캐스트 어웨이에 등장하는 이동식 화장실 문을, 마션에 등장하는 경작 가능한 식물을 탈출의 계기로 해석할 수 없게 만드는 '연막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 가을 날씨가 이리도 따뜻한 이유가 뭘까? 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인디언 써머'라는 말의 유래를 보게 됐다. 


다양한 유래가 있는데 그중에는 북미 인디언들은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면 월동 준비 때문에 백인에 대한 공격을 멈췄는데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시기에 이런 날씨가 오면 다시 한번 백인에 대한 공격을 감행해서 '인디언'이라는 단어가 사용됐다는 설이 있다. 


사실 이 해석을 뒷받침할만한 고증은 없다고 하지만 왠지 끌리는 해석이다. 


인디언은 이런 가을 날씨를 자신의 빼앗긴 토지를 되돌릴 수 있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잠시 동안 지속되는 따뜻한 계절이다 보니 '인디언 써머'라는 말에는 '절망 가운데 뜻하지 않던 희망'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들에게 찾아온 '인디언 써머'와도 같은 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용하여 그들이 처한 난관에서 탈출한다. 


영화 마션에서 마크 와트니는 그에게 당장 발생한 문제들을 차근차근 (영화에서는 one after another라는 표현을 쓴다) 해결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문제를 해결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 세월이 지나면 변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일례로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할리우드의 해석'은 정말로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과는 달리 미국 영화 속에 등장하는 중국은 초강대국이며 과학강국이며 담당자는 모두 미인이며 등 좋은 것은 모두 갖춘 국가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그 해석을 쉽게 말하자면 '중국과 친하게 지내지 않는 포인트가 뭐지?' 뭐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겠다. 


어쩌면 영화 '마션'은 1994년 '국제경제학' 중간고사 때 중국을 '뒹굴고 있는 돼지'에 비유한 당시 학생이었던 한 아저씨에게 그때 매우 중요한 한 차례의 '인디언 써머'를 놓쳤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부족한 나의 통찰력을 원망한다.

By 켄 in 대치동 ('15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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