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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Jul 08. 2020

닿을 만큼 가까이

만항재 하늘공원 새 길 자전거 여행

우연한 일이었다.


지인의 초대를 받아 강원도 정선에 위치한 리조트에 주말 저녁부터 머물 기회가 있었고, 어차피 토요일 낮에는 한가할 예정이라 조금 일찍 출발해 산골짜기 좋은 길을 자전거로 돌아보며 주중의 피로를 풀어볼까 했다. 절반 정도만 계획적인 나 같은 사람들은 즉흥 여행도 곧잘 떠나는데, 아직 며칠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이번엔 꽤 계획적인 셈이다. 출발지인 강원도 정선의 리조트에서 출발해 주위 산 하나를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아오는 라운드 트립(round trip)을 기획했다. 산악 지형이 대부분인 강원도 특성상 오르막의 비율이 많아 쉬운 코스는 아니겠지만, 인기 있는 자연 관광지이니 도로 상황은 대체로 괜찮은 수준일 테고, 데이터를 보니 경사도도 아주 심한 구간은 보이지 않아 적절하다 싶었다.


지도 앱을 열고, 지점을 찍어가며 하이원리조트로부터 이어지는 자전거 길을 찾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갈 수 있는 길은 대부분 자전거가 달릴 수 있다. 따라서 경로를 만들 때, 자동차 전용도로나 고속도로는 제외하고 국도나 지방도 위주로 지점을 선으로 이어 완성한다. 요즈음엔 이런 일이 쉽다. 이렇게 루트를 파일화 해 저장해두면, 지적 정보와 GPS 기술 덕에 초행자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앱으로 생성한 경로를 사이클링 컴퓨터에 저장해 경로를 안내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길이 자전거로 달릴 수 있을만한 길인지, 비포장 도로는 없는지, 언덕이 있다면 어느 정도 경사도인지 등 길의 성격을 파악해 대비할 수 있게 한다.

스트라바(Strava)는 경로 생성을 위한 지적 정보와 기능을 제공한다


이 코스에는 몇 개의 자전거 인기 구간(popular segment)이 포함된다. 살펴보니 만항재(晩項-)라는 익숙한 지명이 보인다. 해발 1,330m의 높은 고도의 만항재는 한국 100대 명산으로 꼽히는 함백산(해발 1,573m)을 넘을 수 있는, 차로 오를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고개다. 먼저 다녀온 지인에 따르면, 이 고개의 오르막은 길고 힘들었지만 정상에서의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고. 실제 함백산은 주위 명산의 봉우리와 능선들을 파노라마처럼 훑어볼 수 있는 최고의 경관으로 유명하다.


정선의 하이원리조트를 출발해 만항재를 오르고, 그 방향으로 내려와 구례를 향해 장산과 서봉을 크게 돌아 만항재 정상에 합류하는, 총 거리 50km 남짓의 단순한 경로를 완성했다. 전체 여정에 큰 고개 두 개가 있었고, 경사도가 비교적 완만하지만 길게 이어져 인내심이 필요한 오르막 구간과 시원한 내리막이 어우러진, 강원도 산자락 청정 경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코스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계획을 전해 들은 자전거를 타는 지인도 함께하고자 하여 휴일인 당일 아침 일찍 강원도의 리조트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인이 또한 게스트를 초대해 처음 의도와 다르게, 총 세 명의 만항재 새 길 자전거 원정대가 구성되었다. 초행길이라 조금 염려는 되었다. 혼자일 때는 헤매도 괜찮지만 함께일 땐 타인의 시간과 노력에 책임이 생긴다. 사실 나는, 상당한 길치다.



GPS 기반 경로 안내 파일(gpx)도 사이클링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고, 강원도 산길은 도심과 달라 갈래길이 단순해 헤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출발지인 리조트에서 출구를 잘 못 찾아 엉뚱한 길로 가는 바람에 염려했던 집단 시간낭비가 발생했다. 한낮의 더위를 염려해 최소 9시 이전엔 출발하고자 한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다행히 이 날 날씨는 구름만 조금 있고, 산골짜기에서 부는 바람 덕분에 자전거를 타기엔 최고의 조건이었으므로, 동행자의 양해로 이 또한 코스의 일부라 여기기로 했다. 미안함이 감사함으로 바뀌며 힘차게 전진.


본격적인 구간이 시작되고, 강원랜드 인근 개발구역을 벗어나자 계곡변 숲길이 나타났다. 계곡 물소리에 바람이 담겨 청량함이 청각과 촉각을 자극하고, 시선이 머문 곳엔 흐르는 맑은 물이 보여 유혹을 참지 못하고 잠시 멈춘다. 함께 간 동생과 너나 할 것 없이 양말을 벗고 얼음처럼 차가운 계곡에 발을 담근다. 오직 달리기만 하는 레이스에선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없다. 그야말로 ‘여행’처럼 나그네(旅)가 가듯(行) 여유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더 지체할 수 없어 상쾌해진 발로 다시 페달을 밟는다.



정암사에서 만항재로


강원도 정선 고한읍에서 만항재로 가는 길은 정암사(淨巖寺)를 기점으로 오르막 경사도가 조금씩 높아진다. 이로부터 정상까진 짧지 않은 구간이라 자전거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은 지칠 수 있다. 적절한 체력의 안배와 인내가 필요하다. 오르막 구간은 각자의 페이스에 따라 무리하지 않아야 완주가 가능하므로, 앞선 이와 따르는 이 사이의 거리가 벌어지게 마련이다. 함께 가는 것이 더 어려운 오르막에선 중간 어느 지점에서 선두가 기다려 일행이 모여 함께 휴식하고 출발하기도 한다. 그렇게 멀어졌다 다시 모여 함께 출발하고, 다시 멀어지는 시간들이 이어져 모두가 정상으로 향한다. 오르막에선 혼자 타는 시간이 많지만,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같은 길을 가는 동료는 정상에 모이니 '함께 였다'라고 말할 수 있다.



끝 모를 오르막에 조금씩 지쳐올 때쯤, 멀리 '야생화 마을'이라 적힌 팻말이 보인다. 물 몇 모금과, 조금 거칠게 마시던 산소에 의지하던 몸이 그로부터 활기를 얻는다. 어느 가게 앞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야생화 슈퍼'라 적힌 간판과 알록달록 화려함이 이색적으로 어울리는, 식당인지 슈퍼인지 정체성이 모호한 산골 작은 하이브리드 가게 냉장고엔 다행히 시원한 콜라가 있었다. (역시 강원도 콜라) 뒤이어 도착한 일행들과 함께, 거친 탄산과 중독적 단맛으로 쓰고 건조해진 목을 축인다. 너무 오래 쉬면 몸이 식어 다시 달리기 싫어질 수도 있어 곧 출발하기로 한다. 오르막에서 자전거는, 처음엔 의지, 다음은 인내, 마지막엔 고난이다. 높이 솟은 봉우리와 계곡, 그 사이 불어오는 바람이 없었다면 인내와 고난의 단계가 더 빨리 오고, 오래 지속될 것이다.


잠시의 쉼으로 힘을 얻어 목적지인 만항재 정상으로 향한다. 이로부터 약 5km 정도의 짧지 않은 산속 굽이길이 이어진다.



혈동 지방도 414호선


만항재 정상의 감동은, 오르는 과정 중 인내의 시간,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레이어드 능선과 구름, 빛이 빚어낸 경치의 합작품이었다. 같은 날의 날씨와 기상, 함께하는 사람들 같이 불특정 요소의 특별한 가능성으로, 일생을 살아도 복사와 붙여 넣기 되지 않을 시간을 기억하려 최대한 많은 셔터를 누르고 눈에 더 담고자 했다. 약 20분쯤 머물다 만항재 정상에서 혈동 지방도 414호선을 타고 긴 굽이굽이 내리막을 달린다. 올라오며 페달에 무게를 실어 한발 두발 밟으며 충전한 위치 에너지는 운동에너지로 바뀌어 굳이 페달에 발을 얹지 않아도 시원스럽게 내려간다. 브레이크는 조심히 잡아야 한다.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차가 간혹 코너에서 중앙선을 넘어올 수 있기 때문에 늘 조심한다.



사방에서 부딪혀오는 골짜기의 공기가 온몸을 식힌다. 덩달아 내리막 속도의 희열은 극에 달한다. 이 다시없을 보상의 길은 장산과 서봉을 지나 상동 시외버스 터미널 방향의 지방도로 접어들면서, 밥때를 조금 지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자 한 마을에 들른다. 이번 여정의 세 번째 보급지인 상동 시장길은,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힘들 터닝포인트이기도 하다. 이제부턴 전진만이 복귀의 유일한 길이다. 근처 산의 유명한 바위 이름을 딴 '꼴뚜 바위 식당'에서, 밥이 떨어져 선택의 여지없이 받아 든 역대급 콩국수로 허기를 달래고 산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참고로, 꼴뚜 바위 식당의 콩 국숫물은 말린 옥수수와 잣 등 견과류도 갈려 있고, 면도 옥수수 면이라 간을 하지 않아도 고소함의 극치를 선사했다. (역시 강원도 옥수수)



다시 만난 하늘 길


구례 초등학교를 기점으로 우에서 흐르던 옥동천 지류는 좌로 위치가 바뀌고, 이로부터 서서히 시계 방향으로 선회하며 장산 서쪽 서봉을 돌아 들어가면, 약한 오르막의 굽이길이 이어지며 3-400 미터 고도를 야금야금 천천히 오르는 계단 같은 길을 달리게 된다. 이후엔 잘못 들어설 여지도 없이 그저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오는데, 이는 지도 위에서도 고배율이 아니면 없는 길처럼 보이는 숲 속 오솔길로 고도는 높아 해발 600에서 800미터 사이에 이어져 있다. 이 길은 길지만 지루하진 않다. 스며드는 빛줄기가 신비롭기까지 한 길은 고요하다. 새 지저귐과 나뭇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는 BGM으로 평화롭고, 이따금 들리는 꿩 사냥꾼의 엽총 소리가 적막을 깰 뿐이다.


차도 사람도 드물어서인지, 나무 위에 있어야 할 새집이 길 곁에 가지런히 지어져 있는 낯선 광경마저, '여기니까 그렇지' 라며 수긍하게 만드는 이 길에, 이름은 있나? 물어보려 해도, 지금 이 집주인은 행방불명 상태다.


새집은 헌 집, 그리고 주인 집 나간 빈 집


함백산의 명 풍경이 사방에 펼쳐져 있음에도, 다시 본격적으로 만항재로 오르는 길을 만나는 갈림길에선 거의 다 왔다는 안도만이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감정의 전부다. 능선이 사라지고 풍차가 더 크게 보이기 시작해 정상이 가까움을 느낄 수 있다. 먼저 내려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오른다. 한 발, 또 한 발. 걸음처럼 밟는 페달에 바퀴는 구르고, 딱 구른 만큼 하늘과 나 사이가 가까워진다. 한 번에 더 많이 오르려면, 더 인내하면 된다. 하지만 욕심을 부리면 자전거에서 내려 걷게 될 수도 있다. 무리하지 않고 분수껏 페달을 돌린다.


 

저 멀리 하늘공원이 보인다. 클릿(신발을 페달에 고정하는 장치)을 빼고 자전거에서 잠시 내린다. 오늘의 두 번째 만항재 정상이고, 전체 여정의 다섯 번째 휴식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안전하게, 다시 한번 바람을 즐기며 내리막에선 바람을 느끼고 평지에선 마음껏 페달을 밟는다. 속도는 오르고, 심박은 낮아진다. 만항재로부터 정암사를 거쳐 거꾸로 가는 길 위 야생화 슈퍼를 지나고, 발 식히던 개울가와 정암사를 거쳐, 올바른 길을 찾고 내쉰 안도의 한숨 주워 처음 이 반나절의 여행을 시작한 그곳으로 무사히 돌아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 가다 결국 정상에서 만나고, 또 내리막을 달려 다시 오르막을 만나는 동행의 모습이 서로의 현재와 미래를 응원하며 반려자와 함께 걷는 가장 이상적인 인생 여행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그래서 인생에 비유하나 보다. 자전거 라이딩은, 평지에선 인위적인 질서에 따라 집단 주행이 가능하지만 오르막에선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인생을 닮은 고갯길에선 각자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여행이 가장 순조롭다. 또한 사람들은 흔히, 인생 내리막을 실패에 비유하고, 오르막은 성공이라 말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경험한 자연 속 자전거 여행은 성공도 실패도 아닌 그저 바쁘고 지친 일상 끝 쉼이었다.


길은 계획이었으나 시작은 우연이므로, 그 날 그 시에 만항재에 간 것은 필연이었을까? 출발 지점을 먼저 정하고, 주위 산 골짜기 지방도를 연결해 멀리 돌아오는 자전거 경로를 완성하고 나서야 이 고갯길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만항재는 하늘공원이라는 별칭이 있다. 오르는 동안 문득 하늘에 닿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기름과 엔진이 아닌 나 스스로의 땀과 숨으로 오르고 보니, 닿을 정도로 가까울 순 있어도 여전히 그곳은 멀리 있다는 걸 더 잘 알겠다. 하늘만 봐선 내 존재가 한없이 작아진다. 고개를 잠시 돌려, 아래 강원도 산간 능선의 아름다움에 취해 봄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어느 여름 낮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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