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니스트리 Jun 05. 2020

자전거로 대화하는 사람들

'라이딩톡'과 함께한 소백산맥 자전거 여행의 기록

이 사람들에겐 때 늦은 주말 봄비 소식은 의외의 세금만큼이나 반갑지 않은 존재다. 아무리 비가 땅에서 자라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 하더라도 라이더들에겐 어쩌다 찾아오는 불청객일 뿐이다. 특히, 큰 맘먹고 떠나는 원거리 투어의 경우엔 비 소식이 들리면 제발 이번엔 기상청이 제대로 '틀려'주기를 바란다. 비우제(非雨祭)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 라이더들이 지낼 것이다.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스포츠 특성상 자전거는 일 년 중 탈 수 있는 날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겨울엔 추위, 봄엔 미세먼지와 황사, 그리고 한여름엔 장마와 무더위가 라이더들의 성실한 취미생활에 커다란 방해 요소이다. 더군다나 올 해는 봄부터 발현된 무서운 전염력의 바이러스 복병에 라이더들의 욕구불만은 극에 달했다. 게다가 '사회적 거리두기' 라니.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도 라이더들은 봄이 되자 보란듯이 도로로 쏟아져 나왔다. 사회적 거리, 아니 야생의 거리에서 2미터 정도는 드래프팅(여러 이유로 앞서가는 사람을 바짝 뒤쫒는 행위)의 상황이 아니라면 자전거를 탄 사람들 사이에선 기본이기 때문에, 다른 스포츠에 비해 코로나에 비교적 '안전하다'는 인식 때문일까?


그러던 중 어느 클럽의 귀한 자전거 여행에 초대받게 되었다. 목적지는 이화령. 문경에서 시작해 새재길과 백두대간 일부를 달리는 평지, 내리막, 오르막이 조화로운 이 코스는 시작지점의 거리상 단체로 버스를 대절해 가기로 했다. 하지만 불안하던 주말의 비보(雨報)가 들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수 확률이 높아도 흩날리는 비 정도로 오후엔 그마저 그칠 것이라는 가능성이었다.


불확실한 불행은 곧 어쩌면이라는 행운으로 연결되고, 소중한 이 한 번의 기회를 위해 모두 출발에 동의했다. '못 타면 근처에서 신선놀음이나 하면 되지'란 제법 경험자들의  비록 게스트 참가지만, 역시나 그들과 같이 자전거와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전날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챙겼다. 보통 이런 날은 실수 없고자 준비물을 챙기고 또 챙기고, 타이어에 공기도 충분히 채워주더라도 빈둥대며 쉽게 자리에 눕지 못한다. 무엇인가 이벤트가 예정된 전날엔, 평소 잘하지 않던 밀린 빨래나 집 청소를 해두곤 한다.


그렇게 이른 한시가 다 되어서야 자리에 누웠고, TV를 켜 둔 채 누워 있다가 스르르 눈이 감긴다.




늦잠을 잤다. 어영부영 준비하고 약속의 장소에 도착하니 커다란 버스와 일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자전거를 싣고, 모인 이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커다란 버스에 올랐다. 오늘 함께 할 팀 이름은 '라이딩 톡(talk)', 자전거로 하는 대화라는 모임 이름이 참 좋다. 난 이방인이지만, 동행이 불편하진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열몇 대의 다양한 자전거, 열몇 명의 다른 사람들을 태운 버스는 이 비가 그치길 바라는 하나의 마음을 싣고 두어 시간을 달려 목적지인 충주의 한 스포츠 센터에 도착했다.


안개가 자욱하다. 산으로 둘러싸인 출발지는 고도가 높아서인지, 아직 쌀쌀한 기온에 가느다란 빗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시야도 어둡고 바닥도 젖어 바로 출발하지 않고 조금 더 버스에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일부는 이미, 위험할지 모를 빗길 라이딩을 포기했다. 약 30분을 기다리자 다행히 비는 잦아들었다. 하지만 노면이 아직 젖어있어 우려의 목소리도 많이 들렸다. 자전거는 그 특성상 젖은 노면에 매우 취약하고, 특히 굽이길이 많은 산악지형 내리막에선 더 위험하다. 여럿의 라이딩을 주최하는 주최자 입장에선 안전이 가장 신경 쓰인다.


하지만 출발을 하게  이유는, 잦아드는 빗방울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바람이 불어 노면이 빠르게 마르는 상황, 그리고 여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가지 목적을 가지고 모인 시간의 가치 때문이었을까? 약간 으슬한 기온에 움츠림도 잠시, 차도 별로 없는 쾌적한 소백산맥 시골 국도가 이어진 안개 자욱한 미지의 언덕에 이끌려 결국 우리 모두는 출발을 위해 자전거에 올랐다.


그렇게 오늘의 투어가 시작되었다. 이제 나를 지지할 것은 한 뼘 손바닥만 한 작은 안장과 한 통의 물, 그리고 앞과 뒤에서 무형의 끈으로 연결된 동료 라이더들이다.





문경 체육공원에서 출발해 남으로, 다시 동으로 연풍면을 향하다 약 오르막 몇 개를 넘다 보면 슬그머니 다가와 발목을 무는 독 없는 뱀과 같은 굽이굽이 산길이 펼쳐진다. 기어 단수를 낮추며 점점 언덕길에 적응해 간다. 무리가 흩어진다. 오르막에선 모두 오르는 형태가 달라 함께 무리 지어 가지 못한다. 각자의 선택에 따라 혼자 남겨지기도, 먼저 앞서가기도, 몇과 도란도란 대화하며 넘기도 하는 고갯길의 매력은, 중반 이후 모두가 한 가지 화법으로 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빠지는 숨, 오로지 밟고 오르는 행위, 이따금 일어서 무게를 싣는 댄싱, 굽은 길 뒤에 이어지는 오르막의 의외성에 내뱉는 탄식 등. 자전거를 탄 클라이머들이 오르는 BGM이 아카펠라처럼 울리는 오늘의 고갯길은 안개가 자욱해 운치를 더한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아래를 바라봐도 보이지 않는 미지의 풍경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수분 가득한 공기는 무거웠고, 오르는 몸은 아직 가벼웠다. 이화령은 길어도 비 정상적으로 가파르진 않다. 정상에서 하나 둘 모인 일행은 다시 원래의 언어로 대화한다. 끝날지 모를 언덕, 배신의 굽이길, 안개 자욱한 풍경, 그리고 이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등에 대한 즐거운 탄식을 더하여.


이화령을 시작으로 령재치, 대야산, 제수리재, 소조령 등, 아직 넘어야 할 고개가 많다. 평지에선 일정 속도를 유지하며 집단이 이동하고, 언덕 초입에선 선두의 신호와 함께 아직 남아있는 힘껏 언덕을 오른다. 이 때는 힘을 아끼는 게 더 힘들다. 적당히 최선을 다해야 멈춤과 끌바(타지 않고 끌고 올라가는 행위)를 예방할 수 있다. 그렇게 기어(gear)를 한단, 또 한 단씩 내리며 속도는 느려지고 심박은 빨라진다. 각자의 주행 방식에 따라 앞 뒤의 거리는 멀어지고, 때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누군가가 지나간다. 대화할 여력이 없어 그저 숨을 몰아 쉬는 인고의 시간. 굽이 길 끝에 쉴 수 있는 정상이 있을 것 같지만 백두대간 산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직 쉴 때가 아냐


얄밉게도, 고갯길은 이리저리 간지럽히며 목에서 쉰 소리가 날 때까지 나를 언덕 아래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문득 뒤를 본다. 멀리 일행 중 한 사람이 보인다. 다시 앞을 본다. 방금 나를 스쳐 지나간 일행은 굽이길 너머로 사라지고 없다. 그런 산속 거리두기 주행 중 너무도 드물게 옆을 보면, 비 구름 레이어(layer) 뒤로 방금 지나온 길들이 수풀 사이 드문드문 보이고, 고개를 조금 들어 산 위를 보니 이제 곧 다다를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겠다. 한발 또 한발 꾹꾹 눌러 나와 자전거를 그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이미 도착한 동료는 '고생했다'며 위로한다.

 

중간중간 보급(식사)을 하고, 사진을 찍고, 다음 코스의 난이도를 걱정하고, 평지를 내달리고, 다시 멈춰 잠시 쉬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몇 개의 고개, 몇 개의 내리막, 그리고 수십 개의 굽이를 돌아 처음 우리가 출발했던 그곳으로 돌아간다. 거칠게 깨진 사기그릇 조각 같은 구불구불한 모양이 집단의 움직임과 치열한 개인의 페달링으로 그려지는 이화령을 시작으로 한 백두대간 끝자락 한 바퀴는 지도 위 선과 사진 몇 장으로 마무리된다. 그렇다면, 지금 함께한 이 그룹의 이름이기도 한 '자전거의 대화'는 언제 어떻게 했나 떠올려 보면, 멈춰서는 입으로, 오를 땐 숨으로, 달릴 땐 수신호로, 큰 흐름 속에서 이끌거나 지지한 그 모든 집단의 손짓, 발짓, 고갯짓, 외침, 방향, 질서, 의지, 책임감... .


이 여행을 자전거로 함께 하는 사람들의 대화법이다.


좋은 사진 찍어주고 공유해준 '라이딩톡' 멤버분들께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이화령


이화령(梨花嶺)은 충청도와 경상도, 두 개의 도 사이에 있고 백두대간 중 소백산맥에 해당하며 고도는 약 548미터이고, 문경새재 자전거길로 통한다.


고개의 종류


자전거를 타면서 자주 듣게 되는 여러 지명들 중, 주로 고갯길을 뜻하는 령(嶺)과 치, 재는 각 이런 차이가 있다고 한다. 지방의 령은 대체로 큰 산맥을 가로지르는 높고 험한 언덕을 뜻하고, 재는 일반적인 접미사로 특별한 규모를 표시하진 않는다. 하지만 '치'는 높고 가파른 언덕을 뜻한다고 한다. 하지만, 지명이 생길 당시에 그 지역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이 구전되어 정해졌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반드시 절대적인 난이도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태령, 우이령 같은 서울의 고갯길도, 그 당시 사람들에겐 험한 산길이어서 '령'이 된 것 아닐까)


팩(pack)


자전거 주행에서 팩이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초행길에 리더는 코스를 숙지해 다른 라이더들을 이끈다. 앞으로만 달릴 수 있는 자전거 특성상 U턴은 번거롭고, 기름으로 가는 차와 달리 자전거의 엔진인 사람의 체력은 정신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므로, 코스 이탈로 인한 쓸데없는 소모를 방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좋은 가이드는 그 여행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다음 목적은 공도에서의 안전이다. 일반 도로 주행 시 혼자 달리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달리면 자동차는 도로를 달리다 한 자전거 '무리'를 발견하기 쉽고 보다 안전하게 비켜갈 수 있다. 또한, 앞선 장애물이나 위험 요소를 미리 발견해 수신호나 구호로 미리 경고하고, 후미에선 추월 차량이나 자전거를 앞선 무리에 전해 이를 인지하여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앞사람이 막아주는 바람으로 인해 뒷사람이 체력적으로 편안한 것도 이로운 점이다.



등록문화재 제304호 가은역 (舊 은성역)




매거진의 이전글 마침내, 꿈의 자전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