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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Oct 29. 2020

고개를 돌려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두 개 여서 감사한 신체 부위가 있다. 나의 경우는 귀인데, 사실 나는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정상 청력의 1/10 정도쯤일까?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한 이 장애는 나의 일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지만 이를 아는 내 주위 사람들은 많지 않다. 아마도 누군가 나와 소음 많은 대로변을 거닐며 대화해 본 일이 있거나, 카페나 강연장 등 공공장소에서 나의 왼쪽에 앉아 대화를 한 적이 있다면, 여러 번 되묻거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못 알아들은) 표정 등이 이상하다 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와 대화하는 상대가 불편할지 모른다는 것이 더 신경 쓰인다. 나 스스로는 대체로 지장 없이 살고 있지만, 때때로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문제는, 어차피 그런 피하기 어려운 상황에 어떤 의미든 연결해 위안받길 좋아하는 나라도, 물리적인 이러한 문제에 대해선 불편함 말곤 아무런 좋은 점을 떠올릴 수 없었다는 점이다. 사실 어느 정도 적응한다 할지라도 불편함을 완전히 잊고 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 텐데, 그걸 좋은 점으로 포장까지 하려 했다니 욕심이 너무 과했던 게 아닐까. 그건 오히려 긍정이 아닌 현실 도피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냥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여러 생활 습관을 정하는 것, 그리고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양해를 구해 서로 오해 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것 등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라 결론지었다.


그렇게 적응해 살다 보니 신기하게도, 한쪽 귀의 청력이 약한 것에 몇 가지 감사한 일들이 생겼다. 여전히 온전히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턱을 괴듯 자연스레 한쪽 귀만 막으면 (특히 사무실에서의) 이러저러 듣기 싫은 소음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도 감사하고, 오른쪽으로 돌아눕기만 해도 귀마개를 한 듯 소음에서 벗어나 잠을 청할 수 있다는 점도 감사하다. 그런데 그중 최고는 역시 왼쪽에 앉은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려 그쪽을 향해야 그네의 말소리가 제대로 들린다는 점이었다. 생각해보면, 상대와 나란히 앉아 대화할 드물지 않은 소통의 기회들에 시선을 거둔 채 자동으로 끄덕이는 영혼 없는 기계적 반응이 아닌, 좀 더 물리적으로, 적극적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가까워진 거리에서 대화를 할 수가 있다는 것이 참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더러 있었다. 전하고 받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일상의 그것과는 다른 진정성이 담겼달까? 나만의 생각일지 몰라도.


그리고 한쪽 청력이 약해도, 음악을 들을 때 난 여전히 양쪽 귀에 이어버드를 다 끼고 듣는 스테레오가 좋다. 조금 삐딱하게 걷는다고 서로 다른 신발을 신지 않는 이유와는 다르다. 그건 아마도, 입체적 느낌(感)이 기능적 힘(力) 보다 우선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쪽 팔걸이가 없이 기울어진 이상한 의자란 핑계로 슬쩍 몸을 기울여 좋아하는 사람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그런 미필적으로 의도된 설렘처럼, 왼쪽에 자리한 사람을 향해 그의 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대화 함에 감사한 것이 그저 현실 부정 혹은 무조건 긍정의 가벼움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걸 깨닫는 데에는, 능력 밖임에도 훌륭히 제 역할을 해주고 있는 왼쪽 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illust by Kamila Bay - One continuous line drawing of two guys one of whom whispers something in the ear of another, 라이선스 부여됨


비밀스러운 대화로 비치는 모습도, 실상 다른 속사정이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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