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니스트리 Dec 30. 2020

시작이 조금은 특별한 일상

겨울 첫 자전거 출근길

그날 아침엔 올해 들어 두 번째로, 차나 대중교통 대신 자전거로 출근하는 '자출'을 했다. 방한에만 잘 신경 쓴다면 적당히 추운 날이 더운 날보다 자전거를 타기가 더 좋다. 달리며 나는 체열과 바깥공기의 한기가 적절히 균형을 이뤄 땀이 잘 나지 않아 사무실에 도착해서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어도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기에 크게 부담이 없다. 물론, 간밤에 내린 이슬이 얼어붙을 정도의 강추위엔 그런 균형은 어림도 없다. 이번엔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날이 나름대로 포근하다는 예보에 올해 첫 한겨울 라이딩을 연휴가 끝난 월요일 출근길에 하는 것으로 정하고 준비했다. 이러한 삶 속 작은 이벤트가 월요병을 극복할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거리는 편도 약 17km로 적당하다. 코로나로 인해 여러 체육시설들도 문을 닫는 통에 몸을 움직일 일이 없었는데, 긴 잠 끝에 기지개를 켜는 것과 같은 개운함을 상상하며 조금 설레는 기분도 들었다.


우선 자전거의 묵은 먼지부터 털어야 했다. 최근 이사한 후, 어수선한 집안에서 이리저리 옮겨지며 짐짝 취급을 받던 자전거라 다 빠져버린 타이어에 바람을 채워 넣는 것 외에도 여러 부위의 점검이 필요했다. 자전거는 차보다 구조가 단순하고 생각보다 튼튼한 탈것이지만 가끔이라도 관리해주지 않으면 의외의 잔고장으로 골치를 썩인다. 가장 흔한 것이 타이어 펑크인데, 대체로 공기압이 충분하지 않을 때 잘 발생하는 펑크는 자전거를 타는 중이라면 크게 난감한 상황일 수 있으므로 타기 전 늘 점검해야 한다. 타이어는 공기를 가두도록 설계되어 밀폐성이 우수하지만 오래 방치하면 공기는 다 빠져버린다. 사방에 널려있지만 소유할 수 없는 많은 존재들처럼, 공기는 가둔다고 영원히 머무르지 않는다. 먼지는 털고, 바람은 넣고, 필요한 곳에 윤활유를 발라주는 것은 자전거를 오래 고장 없이 타는 기본 관리법이다. 그렇게 점검을 마치고, 일찍 일어나 바로 입을 수 있게 겨울 자전거 옷도 준비한다. 회사에 도착해 갈아입을 여분의 옷가지도 챙기고 나서야 잠자리에 든다. 비스듬히 누워 문 켠에 놓인 자전거를 바라보니, 오랜만에 달릴 생각에 안장을 들썩이며 기뻐하는 자전거의 허상마저 보인다.


아침에 알람 소리를 듣자마자 깼다.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이른 시간의 기상이지만 나 답지 않게 바로 일어났다. 대충 세수를 하고 겨울 아침 매서운 칼바람이 앗아갈 체온을 지켜줄 자전거 옷들을 착용하기 시작한다. 동계용 자전거 바지는 안감이 두꺼워 이 것만 입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역시 보온성 있는 재킷과, 그 위에 걸칠 패딩 소재의 바람막이로 소중한 심장과 폐를 감싼다. 하지만 더 신경 써야 할 것은 따뜻한 피가 가까스로 닿는 몸 끄트머리 손과 발과 귀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도 예외 없이 손발이 시린 것은 피하기 어려운 한파의 고난이다. 귀에 걸치는 목도리 일체형 마스크(반다나)와, 귀를 덮는 기능성 모자, 그리고 장갑을 착용한다. 자전거 핸들엔 이미 '바미트'라 불리는 핸들에 장치해 시린 바람으로부터 손을 보호할 대책이 있다. 슈즈를 신고 슈커버(shoe cover)를 덧씌운다. 자전거와 방한대책이 준비되었으니 이제 거리로 나설 일만 남았다.




길을 나서자 도로가 젖어있는 것이 먼저 보인다. 간밤에 비가 왔었나 보다. 영상의 날씨여서 땅이 얼진 않았다. 눈길 보단 덜해도, 젖은 도로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이므로 조심조심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는다. 평소 걸으며 눈에 익숙했던 길도 안장 위에선 조금 낯설다. 이른 새벽 뺨을 스치는 바람이 기분 좋다. 싸늘하지 않은 딱 이 정도의 공기가 좋다. 한동안 고글에 결로가 생겨 조금 불편했지만, 속도가 조금 더 오르며 맞바람이 결로를 날리니 시야엔 크게 방해되지 않는다. 아직 길이 어둡고, 땅은 조금 젖어 있어 더 조심조심, 좌우를 살피며 차가 드문 도로를 달려 나간다. 속도를 조금 더 높이려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전동식 구동계가 말을 듣지 않는다. 며칠 전 충전을 했는데 그 새 방전이 되었나? 앞뒤 합쳐 22단의 변속이 가능했던 자전거는 곧바로 안장 좁은 불편한 1단 자전거로 바뀌어 버린다. 변속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엔, 모든 것은 완벽했다.


전기 자전거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자전거라 부르는 탈 것을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멀쩡한 몸과 멀쩡한 자전거, 그뿐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사실 관성, 지렛대, 구심력, 저항 등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자전거는 그저, 안장 위에서 페달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며 조향(操向)하면 그만인 참 단순한 도구다. 전날 밤 타이어의 공기도 충분히 넣었고, 구동의 핵심인 체인 기름도 칠했다. 하지만 간과했다. 내 자전거에 달린 구동계가 전기 신호로 변속하는 전동 변속기라는 것을. 세상의 모든 전자기기는 전기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이 것은, 배고픈 상태에선 자전거를 탈 수 없다는 진리와 다름없다. 불과 며칠 전 충전을 했는데, 어떠한 이유로 배터리가 빨리 방전되어 작동을 하지 않는다. 사실 변속이 되지 않는다고 자전거를 못 타는 것은 아니다. 고정된 기어로 그냥 타면 된다. 하지만 불편은 하다. 어쨌든 변속이 가능하다는 것은 자전거를 더 효율적으로 탈 수 있는 '발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로드 자전거와 일반 자전거의 차이를 잘 모르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일 수 있지만, 더 이상 변속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앞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되돌아갈지 잠시 고민했다. 가는 것은 어찌어찌 갈 수 있다 하더라도, 퇴근 후 돌아올 것 까지 생각해야 하므로, 아직 터닝포인트 전인 이 시점에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결정이라 여겼다. 변속이 필요한 여러 상황에 무리해 몸이 더 피곤해질 수도 있다. 잠시의 고민 끝에 그냥 가 보기로 한다. 어차피 그럴 거면서, 괜히 서서 고민했다 싶기도 하다. 달리면서 느껴지는 약간의 불편함은 곧 다른 생각으로 이어진다.




얼마 전에 대표 전기차 브랜드 T사의 차에 불이나 탑승자가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이 차는 오로지 전기만으로 움직이는데, 배터리를 다량으로 사용하는 엔진 구동방식과 '스마트 자동차'의 콘셉트로 설치된 손잡이 없는 문이 화근이었다. 해당 차의 문은 연결된 스마트폰으로 열리는데, 이러한 혁신이 도리어 비상 상황의 오작동으로 인한 희생이라는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다. 이 것은 조금 극단적인 예이긴 하다. 그러한 사건에 비하면, 지금 내 자전거의 변속기가 배터리 방전으로 인해 작동하지 않아 겪는 불편은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애초에 기계식이었다면 이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린 초연결 시대에 살고 있다. 집에 있는 스피커는 더 이상 오디오와 케이블로 연결하지 않고 최신 모델의 가전제품은 대체로 무선으로 연결된 스마트폰으로 제어가 가능하다. 우리는 쉽게 연결되고, 또한 간단하게 단절될 수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아주 단순한 오류로 때때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지는 디지털의 배신은 역설적이게도, 이 것을 지나치게 맹신해 아날로그적 대비책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디지털적 오만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요즘 우리 생활 속 필수품인 마스크는, 어린 시절 미래 환경 변화를 주제로 그리는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다. 하지만 늘 그곳에 있던 공기와 나 사이에 한 뼘 경계를 만든 것은 공해가 아니라, 의외로 전염병 바이러스였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리던 것이 매개가 되어 우릴 공격하는 변화를 겪으며, 요즘 가끔 디지털의 배신을 생각한다. 전기가 끊긴 어두움을 다시 밝히는 촛불의 혜택은 오직 초와 성냥이 준비되어 있을 때만 누릴 수 있다.


조금의 불편함으로 시작한 짧은 출근길은 이러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시작부터 예상치 못한 불편함이 없었다면, 이 이야기는 아마도 전혀 다른 전개로 흘러갔을 것이다. 생각의 조각은 아직은 이른 시간, 어두운 한강의 지류 탄천 자전거길을 따라 남으로 이어진다. 예상했던 대로 추위보다 젖은 노면이 더 신경 쓰인다. 아직 길이 어두워 간혹 나타나는 산책길 행인도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시간 이러한 상황에서만 누릴 수 있는 낭만도 있다. 조금씩 동이 터 푸른빛으로 채워지는 공간, 인적 드문 길, 그 위에서 도드라지게 들리는 스르륵스르륵 바퀴 구르는 소리의 묘한 조화로움 끝에, 평소보다 그 시작이 특별한 오늘이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두 바퀴의 구름, 그 사이 하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