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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May 24. 2019

결국 그래서, 떡볶이

이상록(異常錄) - 퇴근길의 벗어남에 이어진 이끌림

2호선 선릉과 역삼 사이.


말발굽보다는 편한 신발이라도, 왕릉에서 역참(驛站) 사잇길은 사람의 두 다리로 닿기에 수월하지 않아 회사가 이 근처인 직장인이나 이 곳을 잘 아는 사람들은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동하는 거리이다. 하지만 이날은 무슨 기운이 솟았는지 퇴근 후 걸어서 역삼 인근에 위치한 목적지인, 몇 달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운동 클럽을 들를  계획이었다. 노트북 대신 운동가방을 들고, 내일이 휴일이라 부담도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무거운 몸 이끌어 겨우내 쌓인 먼지와 살 다 털어버리리라 비장한 각오로 터덜터덜 걸어 그곳으로 향하던 그때, 손에 스마트폰이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대충 어느 정도의 위치라는 것과 감을 믿어보기로 하고 그냥 가던 길 갔다.


그래. 21세기 골목길이 복잡해봐야 얼마나? 감과 행운을 기대하며 한 손 묵직한 가방끈을 부여잡고 어느새 지고 있는 해를 향해 한 걸음씩 옮겨본다. '첫 번째 사거리에서 좌측이랬지? 그다음 우측... 그리고, 교회’. 하지만 보여야 하는 교회가 보이지 않아 조금 헤매다가 무작정 접어든 아파트 사잇길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긴 지 10분쯤 흘렀을까, 어느 골목에서 지치고 허기진 감정 노예의 눈에 보인건 평소라면 지나쳤을 미칠 듯 화려한 냄새와 온기로 유혹하는 한 떡볶이집.


늦은 저녁, 골목길 거의 유일한 생동감에 정신을 빼앗겨 시선을 돌려보니, 무심한 듯 휘휘 저어 바닥의 양념을 섞어주는 할머니의 능숙한 손놀림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향기롭고 따스한 김이 손짓하며 "배고프고 힘들었지? 어서 오게" 라며 소매 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주인 할머니의 환대로 다소 어두운, 그러나 아주 오래전 어느 시절의 그 집이 떠오르는 향수 가득한 공간에 자리를 잡고 나서야 이 곳에 카드 결제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심스레 묻는다. "카드 결제되나요?"


"이체해줘도 돼!"


할머니의 명료하고 친절한 자본주의식 안내에 잠시 안심했으나 곧 절망했다. 아침에 휴대폰을 두고와 지금 수중엔 카드 지갑 하나. 다행히 현금을 인출할 수 있는 체크카드는 있었다. 앉을자리에 가방과 겉옷을 놓아둔 채 다시 나와 근처의 현금인출기를 찾아 떠난다. 원래의 목적도 잊은 채, 오아시스를 찾은 나 홀로 낙타처럼 기쁨에 겨워 힘든지도 모르게 한 10분이나 걸었을까? 비로소 마주한 도심 속 골목의 떡볶이 맛은 어떨까? 첫 한입은 나를 그 시절 국민학교 담벼락 근처 추억의 떡볶이집으로 데려다 주었고 이내 피로함은 어묵 국물과 함께 목구멍 저 깊숙이 사라져갔다. 너무 많은 말을 해 복잡해진 혀로는 느끼지 못할 단순하고 명료한, 어린 시절 그 맛.


배고픔을 달래고 나니 많은 대화가 들린다. 어린 학생 손 붙잡고 귀가하던 어느 어머니의 반가운 인사, 딱 내 나이또래 어느 직장인에게 건네는 할머니의 반가운 환대, 말 대신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몇 장 꺼내 친구와 뭘 먹을지 진지하게 상의 중인 합리적인 초등학생들. 이 집 주위는 북적이진 않아도 발소리 말소리는 끊이지 않아 혼자지만 그게 어색하지 않다. 이 공간에선.


떠올려보니 이 날 하루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싶다. 평소와 다르게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준비했는데도 출근할 때 휴대폰을 안 챙겼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스마트폰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리라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으나 유독 전화를 쓸 일이 많아 답답했고, 풀리지 않던 업무상 소통이 많아 금요일이지만 오후 여섯 시께 마치 월요일 오후처럼 심리적 피로감이 극에 달했었다. 본질을 벗어난, 삶에서 크게 중요하지는 않은 무언가를 위해 싸우고, 할퀴고, 억지로 받아들이고, 버티고 있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나니,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잠시 아무 생각 없이 무언가에 몰입해 잊으려 했지만 그 길 마저 쉽사리 나를 목적지에 데려다주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이 선택에 마주했던 잠시의 쉼은 벗어남인지 이끌림인지, 알 길 없지만 다시 갈 길은 있을까? 할머니네 '떡볶이집'.


어느 금요일의 이야기다.


결국 다시 갔다, 사진 찍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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