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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Aug 31. 2021

별 볼일 없던 밤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로 하루 만에 가기 (2/3)

이전 경험자들이 24시간 무박 부산 챌린지를 하면서 대체로 한밤에, 그것도 자정 즈음에 주로 출발했던 것엔 이유가 있었다. 가장 몸이 긴장되지만 충분한 기력이 있을 초기에 어둠을 극복하면, 조금 지쳐갈 때쯤 밝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조금 더 기운을 내 남쪽으로 더 힘차게 달려갈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시의 음양과 기의 음양을 정 반대로 균형감 있게 맞추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해석이다.






전부를 감내할 선택


출발 전 많은 후기들과 영상을 찾아봤다. 참고할만한 자료가 많았고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충분치는 않았다. 특히 부산행 자전거 여행은 대체로 여럿이 팀을 이뤄 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대여섯에서 열스무 명까지 여럿이 경험자와 함께 도전하거나, 가수 션이나 아이언맨 박병훈 선수와 같이 유명한 사람들의 이벤트성 도전, 아니면 몇 박 며칠씩 넉넉하게 일정을 잡고 종주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니 지금 내가 하려는 무박 부산 솔로잉의 상황과는 사뭇 다를 것으로 생각됐다. 만약 경험 있는 누군가가 있어 위험에 서로 대처할 수 있다면 좋겠고, 위험한 도로에서 앞뒤로 든든한 가드가 되어줄 서포트 카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지만, 혼자라면 감내할 것은 모두와 나눌 일부가 아닌 스스로 해결하고 책임져야 할 전부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출발 당일은 하루 종일 칼로리를 채웠다. 점심을 먹고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도 했고, 또 오후엔 간식을 먹고, 저녁으로 햄버거를 먹었다. 그리고 8-9시 정도 늦은 저녁엔 어머니께서 끓여주신 닭죽을 먹었다. 화장실에서 볼일도 마치고, 물을 충분히 마신 뒤 옷을 챙겨 입었다.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로 국토 동남쪽에 위치한 제2의 도시, 부산으로 향하길 바라며 챙긴 것들을 다시 한번 점검한다.




시작


원래 밤 2시 출발을 계획했지만 준비 하다 보니 시간이 애매해 자정을 넘기자 집을 나섰다. 탄천의 자전거길을 따라 남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은 밤 1시 전후였다. 성남시 야탑에서 첫 번째 오르막인 ‘갈마치 고개’를 넘는다. 탄천을 벗어나 갈마치고개로 진입하면 사방 어디에도 불빛이 없어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이다. 갈마치 고개를 넘으면 바로 경기도 광주다. 은근 숨 넘어가는 갈마치 고개를 넘어 단숨에 서울에서 경기도로, 성남에서 광주로 3개의 시(市)를 지난 셈이다. 


서울에서 충주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방도로 경충대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아직 대로에는 가로등이 밝게 켜져 있고, 가끔 보이는 택배나 화물차량 외에는 도로가 한산했다. 뻥 뚫린 길을 열심히 달리자 90여 분 만에 이천시에 도착했다. 편의점은 여럿 지나쳐 왔는데, 이천시에 들어서서 첫 번째 보급지로 경기도의료원 이천병원에 들어섰다. 한밤 늦은 시간에도 정문과 잘 꾸며진 쉼터가 개방되어 있어 물 한 모금 마시고 지나기에 좋은 장소로 보였다. 땀으로 습기가 찬 고글을 닦아주고, 경로를 다시 한번 점검하며 물과 에너지 젤, 그리고 초코파이 하나를 먹었다. 아직 컨디션은 좋다. 20여 분 머물다 다시 안장에 오른다.



별 볼일 없던 밤


하늘엔 구름이 가득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구름의 형체 때문이 아니라 그로부터 가려진 별과 달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때때로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이천에서 충주를 향하는 길에서 하늘 가득 비구름이 있음이 느껴졌다. 그때문인지 도로는 점점 더 어두워졌다. 게다가 이천에서 멀어질수록 가로등 불빛이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깨닫는다. 어두운 여전히 도로는 한산하다. 노면과 체인의 마찰음은 계속 들리고, 지나는 바람이 풍압을 만들어 다른 소음은 들릴 새가 없다. 



비GM


경충대로는 3번 지방도로를 거친다. 이천에서 장호원을 지나 남으로 계속 달리는 동안 여전히 도로는 여유로웠다. 그러다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두 방울 비가 얼굴로 달려드나 싶더니, 금세 도로 위로 작은 물줄기를 만들 정도의 호우로 변한다. 아주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자전거를 세우고 근처 주유소든 편의점이든 비를 피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 이 지역을 얼른 벗어날 것인지. 전자는 확실하게 비를 피하겠지만 진행은 멈춰야 하고, 다른 하나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게 되지만 비를 맞게 된다. 고민만 했을 뿐, 나의 다리는 페달을 계속 돌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온 몸의 촉각을 곤두세운다. 과속하지 않고, 급브레이크를 지양하고, 눈은 사방을 살피고, 최대한 바르게 나아간다. 이런 원칙적 주행을 한다는 스스로와의 약속과, 그 약속을 잘 이행할 것이란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리고 내 자전거와 내가 나아갈 길에 의지해 멈추지 않기로 했다.


빗줄기가 더 거세졌다. 고글에 맺힌 물방울은 맨손으로 닦다 못해 벗어 귀 뒤에 걸친다. 그렇게 장호원에서 충주를 향해 달리는 동안 비는 계속된다. 이제 풍음보다 더 거센 노면의 빗소리가 이번 장면의 배경음(BGM)이다. 약 30여 km 거센 빗길에 옷과 신발을 적시고 딱 그만큼의 거리를 벌었다. 비는 장호원을 벗어나자 잦아들었다.




첫 번째 식사


충주에 들어서자 날이 밝아진다. 밤새 어두운 꿈을 꾸다 눈을 조금 뜨고 밝아진 창 밖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눈을 뜨는 그 찰나의 시간이 슬로 모션처럼 느껴진다. 눈앞의 시야가 트이자 밥 생각이 난다. 방금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도 배가 고플까?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충주시에 들어서 어느 기사식당에 들른다. 시간은 6시 남짓. 이 시간에는 편의점도 문을 닫아 지방도로변에선 기사식당이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문을 열고 식당으로 들어서자 주인 내외분이 맞이해준다 (반갑게는 아니었다). 다행히 아침 식사가 가능하다고 한다. 자전거를 들여놓고 자리를 잡는데, 남자 주인께서 자전거를 밖에 내놓으라고 한다. 슬그머니 내가 앉을 테이블 한쪽에 자전거를 기대어 둔다. 실내 공간은 충분했다.


“자전거 여기 두면 안 돼요?”


그런데 여자 주인분도 자전거를 밖에 세우라고 한다. 거듭 이 자전거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이고, 누가 가져갈 사람도 없어요.”


가져갈 사람이 있고 없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게 지금 나에겐 전부라고요. 그 심정을 말로 설명한들 어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슬그머니 자전거를 앞에 두고 자리에 앉는다. 주문은 따로 하지 않았는데 남자 주인분이 백반을 내온다. 쟁반 위에 꽤 깔끔한 어묵국과 반찬, 그리고 밥이 있다. 다섯 시간 정도 달린 거리가 120km 정도, 체력은 아직 고갈되지 않았지만 비가 온 탓인지 지나치게 몸이 긴장했다가 풀려 급 졸음이 밀려왔다. 일단 밥을 몇 술 뜬다. 잘 먹히지 않는다. 국에 말아 한 공기를 다 먹고 물로 입가심을 한 뒤 다시 길로 나선다.




문경으로


충주에서 문경 가는 길은 아침에 조금씩 느는 자동차 통행량으로 인해 갓길을 살피며 비켜 간다. 길은 여전히 3번 국도를 지나고, 약간의 내리막과 오르막이 반복되다 수안보를 지나며 조금씩 오르막이 길어진다. 국토종주 최대의 난코스 이화령이 가까워온다. 하지만 이번엔 이화령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 계획한 코스는 소조령 터널을 지나며 이화령을 관통한다.



문경으로 향하며 새재길 자전거도로도 섞어 루트를 살짝 응용했다. 이 때는 하늘이 조금 맑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전히 구름이 많은 하늘이지만, 이번 여정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수를 볼 수 있었던 기분 좋은 길이었다.



... 터널 증후군


이번 여행길에서 지방도를 이용하는 것 자체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자전거 전용 도로의 경우 관리가 잘 되어있지 않아 도로에 장애물이 있거나 요철, 손상도로 등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는데, 지방도의 경우 길이 잘 닦여 있어 갓길 쪽 미세한 파편들이나 손상된 아스팔트만 조심하면 그런 요소는 많지 않다. 딱 한 가지 정말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요소는 터널이다.


터널은 대체로 충분한 갓길이 마련되어있지 않다. 터널은 원래 자전거나 보행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터널에는 자전거가 안전히 달릴만한 공간이 부족하고, 차가 달리는 체감속도가 높은 데다가 상대적으로 어두워 라이더에게는 무척 위험한 시설이다. 지방도의 대부분은 고속도로처럼 차들이 과속을 하는데, 특히 버스나 덤프트럭 같은 대형 차량들이 한번 지나가면 자전거가 휘청일 정도로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친다. 이러한 실체적 위협뿐 아니라 터널이 위험한 것은 바로 소리에서 오는 심리적 위축감이다. 좀처럼 다가올 듯 다가올 듯 가까워지지 않는 차가 멀리서부터 다가오듯 서서히 커지는 공명음은 실제 들어보지 않으면 실감하기 어렵다. 귀를 덮지 않는 헬멧을 쓴 라이더들만 들리는 소리. 사우나 목욕탕에서 작은 성량으로도 빅마마의 목소리를 낼 수 있듯, 터널 안에선 자동차 소음이 크게 울리고 반향 돼 무섭다. 만약 다시 갈 일이 있다면 절대로 긴 터널은 피하고 우회하리라 다짐했다. 정말 다시 이 길을 갈 일이 있다면.



하지만 터널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터닝포인트


터닝포인트는 마라톤을 할 때, 간 거리와 돌아올 거리가 같아지는 지점을 의미하기도, 전투기 조종사가 전투기의 연료상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한 지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삶에선 흔히 큰 전환점을 일컫는데, 나에게 이번 터닝포인트는 문경이 아니었나 싶다. 문경의 소조령을 넘으며 남은 거리가 여태껏 달려온 거리와 비슷하게 되었고, 또 앞으로 달리는 거리만큼 남은 거리는 줄어 문경 이전보다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므로, 긍정적인 방향에서의 터닝 포인트였다.


내가 나온 유일한 사진



비의 선물


간밤 비의 선물일까, 하늘의 뜨거운 햇빛을 적당한 구름이 가려주어 덥지도 서늘하지도 않은 날이 오전 내내 이어졌다. 이 지점의 전반적인 고도(elevation)의 흐름을 보면 충주를 지나서 문경으로 향하며 거치는 조령산 자락이 가장 높다. 국도와 터널을 이용하면 실제 이화령 고갯길에 비하면 경사도는 약한 편이다. 그렇게 소조령터널과 이화령터널 두 개를 지나면 꽤 긴 내리막과 평지가 이어진다. 다리의 힘을 아끼며 단숨에 문경을 지난다. 이제부턴 영천행이다. 시는 여럿, 도는 하나가 바뀐다. 상주를 지난다고 곶감을 사먹을 여유가 없다. 곶감 마르기 전에 길 위에서 내가 말라갈 판이다. 


편의점 연 곳은 무조건 들러 물을 채우고, 자양강장제를 곁들여 에너지를 보충한다. 예상이 맞다면, 상주부터 영천 사이엔 특별히 보급을 할 곳이 드물 것이므로.


세상 친절했던 마성문화진흥회 시의원댁 편의점에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로 하루 만에 가기'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야기 <4.45 부족한 400>은 상주, 영천, 경주를 지나 부산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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