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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Sep 07. 2021

4.45 부족한 400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로 하루 만에 가기 (3/3)

가야 하는 거리의 절반 정도부터는 달려온 거리는 늘고, 그만큼 몸의 부담은 쌓이고, 달려야 할 거리가 줄면서 동시에 마음의 부담은 덜어진다. 몸과 마음의 부담이 교차하는 크로스포인트다.


이제부터는 활활 타는 열정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마지막까지 그 불씨를 약하게나마 길게 유지하자면, 마른 장작 보단 오래 숙성된 숯이 편하다. 숯이 되자. 숯이 되자. 한동안 이 말을 계속 되뇌었다. 그렇게 페이스를 가볍게, 그러나 너무 느리지 않게 유지했다. 산뜻한 기분이었고, 이대로 컨디션을 계속 유지한다면 정한 시간 전 도착은 문제없어 보였다.


문경을 지난 지방도 어디쯤에서 가만히 누워있던 개 한 마리가 갑자기 짖으며 달려든다. '숯이고 장작이고, 지금은 화력을 키워 재빨리 개에게서 도망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보급 불모지


문경에서 봉양으로 향하는 너른 평야 사이의 국도를 지날 땐 그 흔한 편의점 하나 없었다. 나들목과 갓길, 어쩌다 농로 인접한 도로를 달리는데 딱히 멈춰 설 곳이 보이지 않아 약 30여 킬로미터를 그냥 내달렸다. 구름이 해를 가려 날은 더없이 좋았다. 지방도라 차도 많지 않았는데, 가끔 있던 내리막에선 시속 4-50킬로미터를 넘나들며 신나게 달렸다. 물은 달리며 마시고, 조금 허전하다 싶으면 상의 뒷주머니에 넣어둔 파워젤을 먹었다.


봉양면에 도착해 편의점에 들러 박카스와 파워에이드를 섞어 '파박'을 만들었다. 한강에서의 추억이 떠오른다. 늘 곁에 있던 한강이 원래 이렇게 편하고 아련한 존재였을까 싶다.


파워에이드 + 박카스 = 파박


봉양면을 떠나 영천으로 가는 길은 약간의 오르막이 계속됐다. 채운 두 개의 물병 중 하나가 바닥이 나고, 다른 하나도 절반쯤 남게 됐다. 보급을 위해 마을로 들어서자면 가던 길을 조금 벗어나야 했다. 한동안 보급이 없을 것이므로 잠시 고민했으나, 이천에서 충주까지 비를 피해 멈추지 않고 오히려 빠르게 달려 벗어나려 했던 것처럼 이 구간도 얼른 달려 벗어나는 쪽을 택했다. 달리다 보니 다행히 졸린 듯 멍한 기운은 사라졌고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약 20여 킬로미터를 달려 다시 어느 편의점에 들렀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속이 허전한 것을 느끼던 차였다.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먹고 음료수를 마셨다. 하지만 다 먹지 못했다. 다리의 피로와는 별개로, 몸 전체의 체력이 서서히 고갈되고 있음을 줄어든 식욕에서 실감한다.



영천을 향해


군위의 어느 마을은 작아도 잘 정돈돼 보였다. 드라마 세트장 같기도 했다. 아쉽게도 식당은 영업을 하는 곳이 거의 없었다. 시골에서 가끔 보이던 어느 '상회'에 들러 콜라와 캔커피를 사서 마시고 얼마 남지 않은 영천을 향해 다시 출발한다.



이때부터 엉덩이 치골 부위의 마찰로 인한 통증이 더 심해졌다. 조금 불편한 정도에서 아프다고 느낄 정도로 통증이 커지다가 피부가 쓰라린 단계가 되었다. 바르는 피부 진정 크림을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 상태로 군위에서 영천까지 반복되는 오르락내리락 시골길을 달렸다. 차가 많지 않지만 작은 트럭이나 농기계, 경운기가 가끔 보인다. 그렇게 달리다 오후 네 시 무렵 비로소 경상북도 영천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턴 부산까지 약 13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가 남게 된다. 130킬로미터는 적은 거리가 아니지만 내가 자주 가는 남한산성 코스를 두 번 도는 정도의 거리이므로 목표가 가시권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어 조금 안심되었다. 영천에서 식당 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소고기국밥을 시켰다. 맛이 없는 건지 아님 담백한 고유의 맛인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지만, 따뜻한 국물과 밥을 먹으니 속이 편안해짐은 느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문경에서 영천으로 향하는 길에서 기찻길 여럿을 지났다. 어떤 경우엔 기차가 지나가는 동안 건널목에서 기다려야 했다. KTX 같은 초고속열차용은 아니고, 무궁화호나 새마을호 기차가 지나는 기찻길. 여러 차례 길을 잘못 들 뻔했는데, 어떤 경우는 보니 지정한 경로가 잘못된 경우도 있었다. 우회하는 길을 찾아가거나, 쓸데없이 돌아가야 하는 길은 즉석에서 정정했다. 기찻이 가이드가 되기도 했다. 숲은 돌아가고, 농로길은 공유하고, 기찻길은 때때로 기다리며 건너가다 보니 어느덧 이정표에 ‘영천’이라는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경주까지는 건천을 거치는 국도를 지나야 한다.






아직 빛이 걷히기 전에


정신과 시간의 방. 자전거 타는 이들은 이 만화 속에나 등장할법한 개념을 빌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자전거길을 표현한다. 만화의 설정에서,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의 1년은 바깥세상의 하루와 같다. 지나는 풍경도 비슷하게 변화가 없고, 길은 쭉 뻗어 있고, 달리면서 딱히 변수가 없어 그냥 페달을 돌리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으니 라이더들은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이런 길을 지나 영천을 통과하며 비가 조금 왔다. 그러나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았고, 차가 거의 없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국도는 달리기 꽤 괜찮았다.


 

오후 다섯 시 정도였지만 하늘의 비구름 탓에 주위는 더 어둡게 느껴졌다. 이정표에 건천이 보이기 시작한다. 점점 다리에 힘이 들어감을 느낀다. 약하지만 계속 이어진 오르막이다. 그리고 점점 마을과 자연에서 멀어진 고속화도로로 진입했음을 깨닫는다. 정신과 시간의 방 같이 쭉 뻗어 있으나 정신이 혼미할 여지가 없는, 마구 달리는 자동차를 피해 긴장하며 달려야 하는 구간이다. 핸들을 잡은 손이 저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고, 과적 차량이 파손한 아스팔트 구멍이 곳곳에 있어 아찔한 순간을 여럿 지났다.


아직 해가 지진 않았다. 페이스와 현재의 시간을 보니 큰 이변이 없다면 예상한 시간 내에 부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바로 1킬로미터 길이에 달하는 ‘북안터널’이었다.



북안터널


터널은 언덕길 위에 있었다. 기나긴 언덕 위쪽으로 이어진 길은 심지어 고가도로로 양 옆에 갓길이 좁고  도로 가드레일 너머는 낭떠러지와 같았다. 북안터널 입구 옆에 잠시 자전거를 세워두고 우선 후미등을 몇 개 더 꺼내 자전거에 달았다. 그리고 다시 길로 진입하려는데, 차들이 너무 빠르게 지나는 터널로 진입하는 게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워 보였다. 게다가 6시 이후 통행량이 늘어나는 시간, 위협적으로 총알처럼 빠르게 달리는 버스, 화물트럭, 승용차 할 것 없이 행렬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결국 아래쪽 주유소로 다시 내려와 택시를 불러 터널 건너편 주유소로 가 줄 것을 부탁했다. (택시가 잡힌게 신기하다.) 산을 넘든 계곡을 건너든, 목숨 걸고 터널로 진입하든 온전히 내 다리와 자전거로 그 거리를 갔어야 했지만, 아주 잠시 문명의 혜택을 빌어 고난을 회피한 것 같아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터널을 지났어도 이 고속국도 구간이 끝난 것은 아니다. 내리막과 평지로 이어지는 건천으로 향하는 이 길에는 여전히 많은 차량이 시속 80킬로미터 이상으로 마치 버펄로 떼처럼 달리고 있었고, 그들에 비하면 고작 작은 새끼 강아지에 불과한 나는 가까스로 갓길 차선을 넘나들며 작은 홀, 구조물, 볼라드 등을 피해 시속 30-40킬로미터로 달리고 있었다. 자동차 운전자들을 위한 안전장치들은 자전거에겐 장애물일 뿐이다. 그렇게 경주시 건천읍에 도착했다. 여기서 경주시내까진 아직도 10여 킬로미터를 더 달려야 하고, 거기서부터 양산까지는 약 60킬로미터가 남은 거리다. 부산까지 80킬로미터 남짓, 평소 새벽 운동으로 집을 나서 팔당을 거쳐 남한산성을 오르면 60킬로미터 정도로, 해 볼 만한 거리가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아직 구름 가득한 날씨였지만 여전히 빛은 조금 남아있던 이른 저녁 시간이었다.



천년 고도 vs 획득 고도


35번 국도를 따라 이동하다 보니 경주 역이 보였다. 시내 진입로의 커다란 차량 출입문은 전통 기와로 꾸며져 이곳이 신라시대 천년고도였던 경주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관광할 여유가 없어 안타까웠다. 잠시 눈길을 주고 다시 앞을 향해 전진한다. 한동안은 버드나무, 벚나무가 길 양 옆으로 늘어선 한적한 지방도를 지난다. 시끄럽고 위험한 공도를 달리다 잘 포장된 한적한 도로에 들어서니 한결 기분이 상쾌해진다. 날은 더 어두워지고,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된다. 활천리를 지나며 길을 잠시 우회한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아마도 예전에 만들어진 경로라 새로운 도로 상황을 반영하지 않은 경로 탓인 듯하다. 잠시 들어선 마을은 지대가 조금 높았다. 바라지 않던 오르막이다.


라이더들은 처음 자전거를 타며 거리와 속도를 가지고 나의 성과와 성취를 알고, 어느 정도 자전거가 익숙해지면 누적 상승 고도와 파워로써 그것을 분석한다. 누적 획득 고도(cumulative elevation gain)란 표현이 참 재미있다. 아마도 오르막의 운동 효과 때문에 전체 여정 중 고도를 쌓는 것을 획득(gain)이라 표현하는 듯싶다. No pain, no gain(고통 없이 성장 없다)이라는 삶의 공식을 대입하면, 결국 오르막은 고통이란 뜻이 된다. 아무튼, 이번 여정의 누적 획득 고도는 얼마나 될까? 흔히 오해하기를 서울에서 부산 가는 길은 강원도와 같은 산악지대는 아니므로 그리 높지 않다고 하지만, 새도 쉬어간다는 소백산맥령 문경새재를 넘고, 지방도의 쉼 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나며 400킬로미터 전체 거리에 누적 획득 고도는 3,000m를 넘게 된다. 누적 경사도 3,000m의 의미는, 남산을 30번 정도 오르는 것, 한라산 1100 고지를 세 번 오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경주에서 양산까지


35번 국도로 이어진 양산 가는 길에 다시 부슬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빗방울이 거세진다. 이 상황에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100킬로미터도 남지 않은 부산으로 향하는 중에 이제 조금만 더 인내하면 된다는 희망과 즐거운 마음에서의 긍정적 웃음이 아니다. 이제는 무감각할 정도로 통증의 단계를 넘어선 치골통과, 칼등으로 두들겨져 연해진 낙지탕탕이 같은 두 다리, 그 와중에 비까지 내려 젓기 시작한 슈즈속 불은 발의 불쾌감이 겹쳐져 마치 소화되어야 할 음식물이 역류하듯, 해소되지 못한 감정의 비 정상적 발현에 의한 그런 웃음이었다. 애초에 하루 400킬로의 거리를 자전거로 달린다는 계획 자체가 비 정상적 선택이었을까? 그럼에도 아직 4분의 3 거리밖에 오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경주를 분기점으로 거리는 60킬로 정도 남게 된다. 완전히 어두워진 날씨에 노면은 젖어 부슬비가 계속되었고, 약간의 오르막이 지속되며 체력은 계속 고갈되어 갔다. 그러다가 경주시 내남면 국도변의 한 중국집을 발견하고, 감정 해소의 방법으로 ‘짜장면’을 선택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는데, 부산행이라고 다를 바 없겠지.


배를 채우고 나서는 한참을 직선에 가까운 도로를 달려 양산으로 향한다. 35킬로미터 정도를 가면 양산시가 나오고, 이곳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목적지인 부산 터미널이 있다. 35킬로미터는 평소 집을 나서 한강변 자전거도로를 이용해 동으로는 팔당, 서로는 반포대교를 지나 남산을 경유해 돌아오는 정도의 거리다. 탄천과 한강의 합류지점부터 용인 보정동까지의 거리가 약 30킬로미터 정도로, 경험 있는 로드 라이더들에게 이 정도 거리는 짧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선 결코 쉬운 거리가 아니었다. 안장 모서리에 쓸린 치골뼈 주위 살은 쓰라렸고, 그간 잘 관리해오던 무릎 관절도 삐걱거린 지 오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페이스는 떨어지지 않았다.


과거 참여한 적이 있는 마라톤이나 트라이애슬론 경기에서, 골인 지점의 다른 선수들의 지인, 가족, 혹은 대회 주최 측의 스태프들이 모여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선수들에게도 보내는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기억한다. 이 길에 그런 응원은 없지만, 나 스스로에게 보내는 박수와 또 이 일을 마무리했을 때 무사히 종료했다는 안도감, 사회관계망(SNS)으로 연결되어 이 업적을 바라보고 응원과 공감해줄 나와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생각했고, 또 그것이 응원 효과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해할 수 없는 마지막 남은 좁쌀 같은 힘이 희망을 거치며 부산만 해져 나의 두 다리를 받쳐주고 있었다.






양산대로를 타다가 노포 사송로로 들어서기 위해 애초에 다운로드하여 설정해둔 GPX 경로를 따라 우회로로 들어서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이 지역은 모두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과거의 길은 폐쇄되고 일부 임시도로는 비포장에 가까워 자전거가 지나며 많은 시간과 체력을 허비하게 되었다. 재개발 지구가 그렇듯 가로등은 없었다. 간혹 도로 임시 표지와 양 옆에 거슬리도록 점멸 중인 붉은색 전구들만 가득할 뿐. 어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어쩌다 길을 잘 못 들기도 해 다시 제 길을 되찾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양산에서 부산 노포로 향하는 길은 나의 시야에 불모지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길의 방향은 틀리지 않았기에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마지막엔 남산 같은 오르막을 한 번 거쳐야 했다. 그 와중에 자전거에 매달려 있던 후방 점멸등이 하나 둘 꺼져가고 있었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서둘러야 한다. 도로에서 허비되는 시간보다 무서운 건, 후미등이 모두 꺼져 내가 여기 있음을 사방에 알리지 못해 위험에 처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사 났네


양산을 지났다. 이제 10킬로미터 남짓 남았다. 거의 다 온 것도 경사, 눈앞에 남아 있는 것도 경사. 약 1.7km의 기나긴 양산고개를 그렇게 경사났네를 외치며 달리다 부산광역시 이정표가 보였다.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고 조금만 더 달리면 노포동 부산 터미널이 나온다. 이 시점부터 약 300킬로미터는 이번 여정에서 가장 시간도, 거리도,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강박도 벗은 자유롭고 조용한 주행이 아니었을까? 이 길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터미널까지 가는 길 좌우론 아무것도 기억될만한 것이 없었다. 불빛도, 사람도, 그 흔한 편의점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도로. 그런데 거짓말처럼, 터미널에 거의 다 오자 손님을 태우려 기다리는 택시의 행렬이 보였고, 시야에 갑자기 터미널이 보였다. 그렇게 갑자기 이번 모험 중 가장 큰 파트가 끝났다.


한동안 자전거에서 내리지 못했다. 감격의 눈물도 없었다. 호흡은 안정됐고, 다리는 피로했고, 마음은 안도됐다. 무사 일주. 아무런 사고 없이 경험을 남긴 이번 여행 395킬로미터의 서울 부산 무박 종주는 이렇게 끝났다.



터미널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아직 젖지 않은 여분으로 챙긴 수건으로 뒤처리를 한 뒤 편의점에 가 맥주 작은 캔 하나와 김밥, 우유를 샀다. 버스 출발 시간까진 아직 여유가 있었다. 티켓을 출력하고, 버스로 가 자전거를 실었다. 혹시라도 버스 화물칸이 가득 차 있으면 낭패일 수 있으나, 다행히 내 자전거 한 대 눕힐만한 공간은 남아 있었다. 11시 50분 출발하는 서울 고속터미널행 버스가 출발하며,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시원한 축배를 혼자 들고 깊은 잠에 빠졌다.


눈을 뜨니 서울이었다.






집으로


서울 고속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출발 후 정확히 3시간 50분이 지난 3시 40분이었다. 무인 열차도 아니고, 사람이 운전하는 버스인데 시간 참 정확하다. 아마도 늘 다니는 길, 늘 비슷한 통행량, 그리고 버스 기사님의 오랜 경력과 숙련 때문일 것이다. 자전거는 오래 탔어도 부산행이 초행길인 나로선 넉넉히 시간이라 할지라도 여러 변수로 결국 해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듯싶다. 가장 안전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던 나는 이제 다시 안장 위에 올라 집으로 가는 마지막 거리를 주행해야 한다. 나의 이번 여행은 끝났지만, 집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마무리되는 이번 여정의 마지막 길은 반포 고속터미널에서 탄천으로 가는 한강변을 달린다.



늘 달리는 한강이 이렇게 포근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다리는 무겁다. 앞으로 나아가도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남은 거리는 한계를 조금씩 넘나들며 하는 운동적 주행이 아닌, 정말 순수하게 집으로 향하는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 그런 편안한 이동 수단으로서의 자전거를 타고 있다. 가장 본질적인 자전거의 목적인 샘이다. 비로소 좌로 펼쳐진 한밤의 한강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무수히 다니면서도 늘 빠르게 달리는 것에 집중해 눈에 잘 담지 못한 예쁜 한강이다. 그렇게 30여분 동안 13.39킬로미터를 이동해 집에 왔다. 다리도, 의지도, 하루라는 허락된 시간도 다 쓰고 쓸 이야깃거리 한가득 안고.


씻고, 다시 맥주 하나 꺼내고, 책상에 앉아 터 오르는 동을 보며 이 글을 적는 시간이 이렇게 감사할 수 없다.






이 길을 나서고는 습관처럼 자주 길을 탓했다. 왜 노면이 거치냐고, 왜 갓길이 지저분하냐고. 왜 언덕이고, 왜 차들이 이렇게 배려 없이 쌩쌩 달리냐고. 그런데 생각해 보니 길은 늘 그곳에 있었을 뿐 아무 잘못이 없었다.


문제는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4.45 부족한 400


누군가는 나에게 조금 더 가다 돌아와 400킬로를 채우지 그랬냐고 했다. 사실 마지막 교차로에서 그런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다. 살면서 하루 400킬로를 달리는 일이 흔한 일도 아니고, 또 다신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395킬로를 달려왔다면 마지막 5킬로미터 정도도 달릴 수 있다. 몇 개월 밤낮없이 고생했다면 하루 이틀 정도 더 하는 건 고생도 아니다. 사람의 능력이란 늘 그렇다. 그래서 적당할 때 멈추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여긴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목표 지점을 벗어나 조금 더 달리다 돌아와 400킬로미터란 숫자를 맞추는 것은 이번 여정에 큰 의미가 없었다. 내가 출발점에서 목표로 삼았던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겪었던 일, 달렸던 길, 지나온 도로 위 표지판, 나에게 달려들었던 개, 무서웠던 터널, 상쾌했던 지방 도로의 이야기로 꽉 들어찬 가장 완벽한 395.55킬로미터였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다.


터널 끝 화이트아웃 - 현실, 혹은 희망


떠나야 했던 이유


최근 나의 삶은 자주 자르지 않는 푸석한 머리와 포진이 생긴 왼쪽 아랫 잎술로 표현됐다. 하루 두 번의 출근이 꿈일 때도 있었지만, 원하지 않던 방향에서 그것이 의무가 되자 매일이 마무리도 성취도 없어진 공허한 느낌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불확실하고 바쁜 삶의 연속. 어쩌다 시작한 이 일이 어지럽게 자주 마음을 흩트려 때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도 자전거는 타야겠기에, 일과를 마친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주로 탔다. 자주 가는 길을 마음껏 달리다 보면 어느새 땅거미를 밟거나 새벽에 터 오르는 동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 혼자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가장 복잡한 풀리지 않는 이 실타래 같은 삶의 숙제를, 길 위에선 조금이나마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 꼬였던 길도 달리다 보면 결국엔 풀리게 마련이니까.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시기가 중요해졌다. 체력을 기르고, 날이 선선해질 때를 기다리다간 늦을 것 같았다. 고갈된 갈증을 풀자면 지금 당장이어야 했다. 오늘 마음먹지 않으면 안 됐다. 시간이 지나 의지를 잃으면 아무리 풍족한 준비를 하더라도 다시는 떠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길일 것이다. 이번 여행엔 비행기 티켓과 같은, 출발에 필요한 어떤 강제적 동기가 없는 것도 이유다.


떠나기로 하고 나서 오래전 사진을 보다 깨달았다. 딱 5년 전 이날 아버지와 평생 잊지 못할 먼 거리의 자전거 여행을 떠났었다. 목적지는 여수.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와 비슷했지만 당시 날이 무척 더웠던 탓에 매우 힘들었던 기억이다. 물론 하루 만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2박 3일을 달려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섬진강 자전거길과 곡성 - 순창을 잇는 지방도로는 예뻤고, 다시 달리고 싶을 정도로 좋은 기억이었다. 그리고 궁금했다. 더 성장한 내가 혼자 먼 거리를 갈 수 있을까? 꼭 성공적으로 다다라 그때의 기억과 아로새겨지길 바랐다.






이 것은 여행이었나?


이번 부산행은 여행 이었을까?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고, 서서 기념사진도 찍지 않고, 명소나 유적지도 들르지 않고, 그저 '그 곳으로 간다'라는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먹고, 쉬고, 달렸던 이 길은 여행이었을까?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모든 과정상 할 이야기 가득했던 그런 과정을 모두 삶 속 작은 이벤트, 즉 '여행'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면 이번 도전은 그 자체로 여행이 맞다.

..고 생각한다.




 1편 <프리솔로 - 완벽한 자유>, 2편 <별 볼일 없던 밤>에 이어 3편 <4.45 부족한 400> 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로 하루 만에 가기'의 에피소드를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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