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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Aug 24. 2022

비라도 왔으면

서울에서 문경 이화령까지 자전거로 가기 (1/2)

흔히 마라토너나 사이클리스트들은 그들이 달리는 모든 길을 인생에 빗댄다. 맑은 날과 궂은날, 오르막과 내리막, 함께하는 이들, 그리고 혼자일 때의 나름의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도 결국 모든 과정을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까지 인생을 빼닮았다.


새재 자전거길, 그리고 이화령 고갯길을 지나는 굽이굽이 예쁜 자전거길에서 ‘강물이 굽은 이유’를 언급한 소설   대사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아마도 모든 고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보단 조금은 유연한 판단과 결정이 인생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려 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서울에서 충주로, 그리고 충주에서 새재 자전거길을 진입해 소조령 언덕과 이화령을 오르는 총 190km, 약 9시간 자전거 여행의 기록이다. 돌이켜 보면 새재 자전거길 이전에 비는 오지 않았지만 날이 무척 더웠고, 차가 빠르게 달리는 공도가 많아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러나 새재 자전거길로 접어들며 그 길을 달려온 반전적인 매력도 큰 여행이었다. 더군다나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면, 이보다 감사한 라이딩이 또 있을까 싶다.




#또 이화령


이화령은 여태껏  번을 갔다.  번은 여럿이 버스로 가서 이화령을 포함한 주위의 여러 ()들을 돌았고,  번째는 서울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가는, 일명 '무박 부산' 프로젝트에서 소조령 터널을 지나며 관통했었다. 이후 나무와 물이 많고 산세가 예쁜 이화령이 계속 기억나 다른 방식으로 가보고 싶어 오래전부터 희망했었고, 이번엔 서울에서 출발해 충주를 거쳐 새재 자전거길을 지나 대여섯 시간을 자전거로 달리는 여행의 목적지로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이화령은 충주에서  40km 거리에 있고, 충북 괴산군과 문경시의 경계에 위치한다. 4.3km  오르막 거리에 6% 정도의 경사도를 가진 적당한 난이도로 굽이굽이 풍광도 멋진 새재 자전거길을 포함해 많은 라이더들의 사랑을 받는 자전거 명소다.



#왜 밤에 출발하려 했나


처음 이 계획의 이름은 ‘해 뜰 무렵 이화령’이었다. 밤에 서울에서 출발해 해 뜰 무렵 이화령까지 간다는 다소 특별한 계획은 사실 이전에 했던 무박 부산행이라는 한 도전에서 영감을 얻었다. 무박 부산행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24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약 400km의 거리를 자전거로 완주하는, 라이더들 사이에 유명한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다. 무박 부산행은 체력도 체력이지만 정신력이 더 중요한 여정이다. 한반도를 대각선으로 쭉 이어 달리는 중간중간 이정표의 지명이 바뀌고, 거리를 가리키는 숫자가 줄어들며 점차 커지는 희열이 마지막 '부산 터미널'에서 정점을 찍는 그런 여행이다. 그 길은 해가 지고 출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두워 차량 통행량이 많지 않은 시간에 평소 혼잡한 서울 근교를 빨리 벗어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 이천에서 충주까지 가는 도로에는 가로등이 제법 있어 생각보다 어둡지 않으나, 문경을 지나며 도로가 어두컴컴해지는 것도 이유다. 한적한 도로를 오로지 자전거 바퀴 구르는 기분 좋은 소리만을 들으며 달리다 보면 문경에 가까워질 무렵부터 점차 밝아지는 하늘을 보게 된다. 상상만으로도 몽환적이기까지 한 경험이다. 이번 여정은 부산행이 아니다. 비슷하게 달려 이화령에 닿는 것이 목표다. 밤새 달려 지친 몸은 그렇게 밝아오는 하늘, 이화령 정상에서의 물 한 모금, 그리고 돌아오는 버스에서의 개운한 휴식으로 깨어날 것이다. 그래서 열 시 즈음 밤에 출발하려 했다.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이유


한 번의 힘들고 긴, 그만큼 뿌듯한 성취감이 남을 멋진 경험을 위해선 '언제', '누구와', '어떻게' 등과 같은 계획이 잘 세워져 있으면 좋다. 계획은 생각을 현실과 가장 가깝게 만들어주는 도구랄까. 하지만 계획이 아무리 촘촘해도 변수는 늘 그 사이를 복잡하게 헤집어 놓는다. 그 변수의 첫 번째는 자전거였다. 우리가 타는 자전거는 예민하다. 늘 극한에 우리의 몸을 지탱하며 나아가는 자전거는 아무리 튼튼한 소재로 만들어졌어도 여러 부위에서 문제가 생긴다. 이번에도 그랬다. 출발하기 전 예상치 못하게 자전거에 문제가 생겼고, 그것을 해결하느라 약 3주간의 시간을 더 연장해 출발 날짜를 조정해야 했다. 또 자전거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최근 지속된 장마와 예상치 못한 폭우로 인해 미리 계획했던 여행은 출발일 하루 전까지도 시작의 확신을 주지 못했다. 계획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면 며칠 미룬다 해도 큰 일은 아니겠지만, 이미 함께하기로 한 여럿의 계획과 시간이 얽힌 실타래는 모두의 기대감만큼이나 너무 커져버려 한번 풀어지면 다시 엮어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안전하지 않은 상황을 알면서도 출발하진 않을 것이다.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은 대체로 궂은 길에서 만들어지고, 궂은 길은 대체로 비로부터 생긴다. 그리고 출발하는 당일까지도 날씨 앱(app)은 변함없이, 그날 밤부터 비가 많이 올 것이라 예보했다.



#쫓기는 것보다 먼저 보내는 것이 낫다


비의 상황을 가정할 때 우리는 취소만을 고려했었다. 일기 상황은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후부터는 일부 지역에 강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밤 무렵 비가 그친다 해도 아직 젖어있는 길에서 로드 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는 없는 일이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 라이딩은 그냥 포기의 수순일 것이다. 나를 제외하고 총 열 명의 인원은 모두의 계획에 배신당한 채, 각자 다른 것들로 하루를 채워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을 이렇게 함께 할 기회는 곧 흩뿌려질 빗줄기와 함께 다음날이면 사라질 것이다.


더 늦기 전에 결정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함께 하는 이들과의 대화방에 '우천이 예상되므로 이번 라이딩은 취소합니다'라고 적다가 문득 날씨 예보 앱을 다시 봤고, 강수확률 추이 그래프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역별 시간대별 강수확률에 의하면 비 구름이 자정을 기점으로 점차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비에 쫓길 것이 아니라 비를 먼저 보내면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야 시간에 출발하는 것이 이번 여정의 특징이긴 한데, 그것을 버리면 나머지 계획은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보다 이른 아침 시간에 출발하면 오후께 도착해 돌아오는 버스에 무사히 탑승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함께하는 이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렇게 대화방에 썼던 '취소'라는 말을 지우고 다시 썼다.


'혹시 내일 아침에 일찍 출발해서 오후에 도착하는 계획으로 하면 어떨까요?'




#익숙한 길은 있어도


최초 참여 인원에서 아쉽게도 시간상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은 이탈했다. 처음 11명이 있던 대화방엔 7명이 남았다. 이 정도는 그룹을 나눌 필요도 없어 괜찮다고 생각했다.


최근 폭우로 유실된 자전거도로가 염려되어 시작점을 국도 진입구간에서 최대한 가까운 전철역으로 정했다. 예상처럼 밤새 많은 양의 비가 왔고, 아침 무렵 땅은 여전히 젖어있었지만 그래도 해가 드는 도로들 중심으로 조금씩 마른땅이 보였다. 이른 아침 성남과 광주를 잇는 첫 번째 관문인 '갈마치고개'를 넘으려면 우선 '성굴 고개'라는 곳을 넘어야 했다. 자전거가 지나기엔 무리가 없었지만, 도로 한편이 완전히 유실된 터라 차량은 통제 중에 있었다. 폭우가 지난 흔적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한적한 고개를 지나 갈마치고개로 접어들었다. 약 1km 남짓의 갈마치고개를 넘는 것을 시작으로, 7인의 이화령 원정대는 서울과 충주를 잇는 3번 국도(경충대로)로 접어들었다.


처음 계획과 달리 출발 즈음엔 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해 질 무렵 이화령'이 되었다. 해가 뜬 지 오래지 않은 시간에, 해 질 무렵 닿을 그 멋진 고갯길로 향할 라이더들은 경기도 광주에서 이천으로 이어질 3번 국도를 한동안 달렸다.


'익숙한 길은 있어도 익숙한 라이딩은 없다',


고 생각한다. 이날 구성된 팀엔 자주 호흡을 맞춘 익숙한 라이더도 있었고, 이 날 처음 만난 게스트도 있었다. 누구든, 모임을 이끄는 리더 입장에서 팩을 이끈다는 건 건 사실 부담스러운 일이다. 길의 여러 위험요소를 살피면서도 모두에게 오버페이스가 되지 않도록 늘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수신호와 더불어 속도 완급 조절은 적시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렬로 늘어선 주행에서 두 번째 자리한 사람이 경험자이면 그런 부분에서 꽤 도움이 된다. 두 번째 포지션은 미처 선두에서 보지 못한 주의할 요소들을 파악해 뒤로 전달하고, 앞에서 볼 수 없는 뒤쪽의 상황을 앞으로 전하며, 뒤쪽에서 적당한 거리로 따라 주행할 수 있도록 완급 조절에도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조율사의 역할이랄까. 그런데 많은 라이딩 그룹에서는 두 번째를 가장 편안한 자리로 인식해 경험이 부족한 초보 라이더들의 자리로 지정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경우는 달랐다.


팩 주행은 열차에 비유하기도 한다. 출발하면 멈추기 전까지 같이 달리면 되므로, 어찌 보면 단순하기도, 또 복잡 미묘하기도 한 일렬로 달리기. 이렇게 달리면 존재감이 생겨 차량의 위협도 덜한 느낌이다. 파편이 된 기억을 하나의 팩으로 연결해 이야기를 짓는 것도 비슷한 일인 것 같다.




#비라도 왔으면


그렇게 오지 말라고 했던 비를 먼저 보내는 것으로 우리가 달릴 수 있는 기회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구름이 훑고 간 하늘은 너무 맑았고 거기 떠 있는 해는 너무 뜨거웠다. 위치상 우리의 목과 등에 내리쬐는 해는 자비롭지 않았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숨은 평소보다 더 빠르게 가빠왔다. 적당한 힘으로 달리는 동안엔 마주 불어오는 바람이 몸에서의 열을 식혀주지만, 신호에 멈추면 오르는 열기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러니 달릴 만은 했고, 신호에서 쉬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래서 자주 멈추는 만큼 자주 쉬며 수분을 보충해야 했다. 수분과 더불어 헐거워져 가는 의지의 끈도 매번 당겨 조여주었다. 이 정도면 갈만 하다. 혼자보단 그래도 함께가 낫다. 이런 생각을 계속하면서. 말은 하지 않아도 아마 달리는 동안에 일행도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간혹 물웅덩이를 지나며 튀어 오르는 물방울, 손바닥만 한 그늘, 어쩌다 해를 가리는 구름이 반가운 것도 모두 한마음이었을 것이다.


'비라도 왔으면'


그렇게 피하고 싶던 비를 바라고, 그렇게 바라던 해는 피하고 싶어 졌던 매우 정상적이면서도 이상한 심리를 발견하기도 한 더운 한낮이었다.


2편 <강이 굽은 이유>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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