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니스트리 Dec 02. 2022

그래서, 브롬톤

기온이 영상 6-7도로 다소 쌀쌀하다 여겨지던 11월 어느 날, 기다리던 박스 하나가 집 앞에 도착했다. 머나먼 서쪽 섬나라 영국에서 보내온 그것은 도착 예정일 아침 집을 나서는 시간 마치 꿈처럼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부지런한 우체국 기사님 덕분인지 아니면 나의 오랜 염원 때문인지, 그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배송된 박스는 야속한 출근시간 탓에 현관문 안쪽에서 다시 만 하루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날은 여러 일정으로 무척 바빴다. 최근 몸에 사소하지만 놔두면 커질 수 있는 문제가 생겨 병원의 진료가 있었고 저녁엔 반가운 이들과의 식사 약속에 갔다. 낮시간 회사에서의 일은 말할 것도 없이, 종일의 일들 모두 다른 데 관심을 둘 정도로 한가로운 일들은 아니었지만 정신의 반 아니, 내 영혼의 반쪽은 아직 집 현관 안쪽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리 길어도 그간의 상상만 할까 하며, 그렇게 기다림의 하루가 가고 드디어 마주하게 된 무릎 정도 높이의 제법 묵직한 상자. 겉포장 비닐을 뜯자 앞뒤로 딱딱한 글씨체로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Made For Cities, Made In London'
(도시를 위해, 런던에서 만듦)


이런 클래식한 모던함을 봤나. 영국의 감성, 미니벨로 자전거계의 명품으로 일컫는 '브롬톤(Brompton)'이 포장된 채로 눈앞에 있었다.


도시 라이더들을 위해 만듦


브롬톤은 세상에 널리고 널린 접이식 생활 자전거의 일종이다. 하지만 브롬톤을 아는 사람들은 접이식 자전거라 부르지 않는다. 브롬톤을 타는 사람들은 '브롬' 혹은 '브로미'등 귀여운 어감의 애칭으로 부른다 (심지어 브롬톤을 타지 않는 이들 중 일부도). 브롬톤이 비싸 못 사겠다는 사람은 봤어도 브롬톤을 샀는데 후회한다 말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 물론 그 가격이 부담스러워 선택을 꺼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일까, '유사 브롬톤'이라 불리는 비슷한 생김새와 폴딩 방식의 카피 제품도 많다.


브롬톤을 검색해보면 신기하게도 비판적 글이나 영상을 찾기 힘들다. 그나마 비판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무게'정도? 하지만 일반 생활형 자전거에 비하면 그 무게는 브롬톤 가치의 중량보다는 가볍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사용자로서!). 쉽게 접히고, 쉽게 펴지며, 작게 접힌 상태로 마치 여행 캐리어처럼 끌고 다닐 수 있어 무게의 단점을 덮어 가리고도 남는다. 색이 멋진 그레이색이라서 따뜻한 느낌의 '얼그레이'로 이름붙인 이 브롬톤을 처음 맞이한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 언박싱


박스를 열고 어떻게 꺼내야 할지 헤매지 않았다. 주문을 하고부터 이미 여러 편의 언박싱(unboxing) 영상을 찾아봤기 때문이다. 우선 박스를 열고, 안에 담긴 작은 상자와 본품을 꺼낸다. 반짝반짝, 영롱하다. 이쁘다. 안전하게 손상 없는 배송을 위해 사용된 타이와 스티로폼 보호재를 제거하고 안장을 지지하는 시트포스트(seatpost)를 늘여 고정한다. 그렇게 지상에서 위로 살짝 들어 올리면, 뒷바퀴가 펴지며 '달칵' 소리와 함께 자전거가 제 모습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다. 뒷바퀴가 대롱대롱 매달려 발로 살짝 뒤로 밀어준다. 반동을 이용해야 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 미안해하며 조심히 다른 접힌 관절을 펴준다.


소형 박스 안에는 안장과 용도를 알 수 없는 금속 쪼가리가 몇 개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그 용도를 파악했다. 며칠 동안 참을 수 없어 틈틈이 찾아보며 눈에 새긴 덕분에, 그 부품이 브롬톤의 힌지 클램프(hinge clamp)라는 것을 알아보고 조심히 그것을 핸들을 지지하는 스템(stem) 쪽 힌지와 프레임 쪽 힌지에 돌려 끼워준다. 그러자 펴진 관절이 고정되고, 브롬톤 특유의 곡선형 모습이 완성된다. 이제, 브레이크를 점검하고 바퀴에 바람만 넣으면 달릴 준비 완료.


넓은 주차장에서 작업



# 바뀐 일상


바퀴가 더 얇고 구부정한 자세로 더 불편하게 타야 하는 로드 자전거에 익숙해서일까, 브롬톤은 상대적으로 편안했지만 코너를 돌 때나 일어서서 페달을 밟을때 조금 어색했지만, 몸에 붙는 기능성 옷을 입고 발을 페달에 고정시키는 전용 슈즈를 신어야 하는 로드 자전거와 달리 브롬톤은 그냥 평소 신는 신발과 일상의 복장으로 탈 수 있다. 그것은 로드와 비교할 수 없는 극강의 편안함이다. 일상의 편의를 위해서만 발전해온 브롬톤의 본질 때문에 첫 페달링의 어색함은 이내 사라졌다. 좀 더 오래 지속된 익숙하지 않음은 세우고, 접고, 끌고 다니다가 다시 펴는 브롬톤만의 핵심 기능들잉었다. 처음 브롬톤을 타고 회사에 도착했을 때, 건물 입구에서 다시 접는데 진땀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 짝퉁 아닌가... 왜 이렇게 안 접히죠?". 하지만 문제는 노련한 엔지니어가 만든 제품이 아닌, 미숙한 사용자에게 있었다.


브롬톤을 맞이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시간에 총 340km의 거리, 13일의 출퇴근에 함께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되도록 매일 탔다. 거리는 선택하는 길에따라 편도로 10-15km 정도로 딱 적당했다. 50분을 넘기지 않는 이동시간에 적당한 강도의 유산소 운동도 겸하게 됐다. 소요되는 시간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근할 때와 비슷하거나 빠르다. 조금 여유롭게, 출근길 차들로부터의 스트레스를 피하고 싶다면 테헤란로나 선정릉길을 피해 신사 가로수길을 이용한다. 이 주변은 다른 길들에 비해 한적하고 젊은 감성이 좋다.



브롬톤과 함께하며, 늘 갈아타야 하는 전철의 환승시간과 집에서 역, 역에서 회사까지 오며 가며 사람들에 치이는 스트레스와 불편함은 일상에서 멀어졌다. 애초에 집이 이사하고 회사와 그 정도 거리가 생기며 자전거는 좋은 대안이 될 것임은 알고 있었다. 적당한 거리란, 너무 가까우면 운동효과가 아쉽고, 너무 멀면 다니기 힘든 그 어중간한 지점이었다. 원래 자전거 타는것을 좋아했지만, 가지고 있던 로드 자전거는 여러 여건상 출퇴근 탈것으로 적당하지 않았다.


최근 유행인 전동 스쿠터나 킥보드와 같은 탈것도 고려하지 않았다. 몸이 편한 대신 겨울엔 체온 유지가 어렵고, 배터리가 방전되면 이동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자전거는, 한창 추운 날씨에도 칼로리를 태워 열을 만들고, 그로 인해 부족한 운동량도 채워줄 수 있다. 여러모로 이걸 진즉 샀어야 했다는 생각이다.



# 그래서, 브롬톤


브롬톤을 산 걸 알게 된 지인들 중 일부는 "지름신이 오셨네! 자전거를 또 샀어?"라고 그 소비를 다소 충동적이거나 무분별하다 생각했고, 또 일부는 "어이구 그 비싼걸? 그렇게까지 필요 해?"라며 과소비라 생각했다. 이해는 된다. 그런 류의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모두 브롬톤을 알고는 있지만 경험하지는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굳이 브롬톤을 산 핑계는 이렇다. 원래 자전거를 좋아했고, 브롬톤은 처음 본 십 수년 전부터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살지 말지 고민한 것도 10년도 더 된 일이다. 최근엔 코로나로 인해 물량 수급이 심상치가 않다. 갈수록 가격은 더 오르고 또 국내에서 재고를 구하기 힘들게 될 전망이다. 지금 갖지 않으면 이후에는 더 큰 부담을 가지고 구매를 고민해야 하며, 흐르는 시간만큼의 기회비용은 더 지불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더 늦기 전에 결정했다.



오래지 않은 기간지만, 확실한, 브롬톤이 가져다준 일상의 변화는 이렇다. 서로 어깨가 부딪히며 눈치껏 이 사람 저 사람 피해 탁하고 무거운 공기가 가득한 지하철 역사를 드나드는 대신, 하루의 첫걸음을 자연이 어우러진 길 위로 내딛는다. 남들은 신경 쓰지 않는 몰상식한 행인 대신 눈치껏 날아 피하는 강변의 비둘기를 만나고, 어차피 그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듯 물길 따라 유유자적 떠다니는 오리들도 본다. 가끔 같은 목적의 자전거 여행자를 만나면 말없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담'을 나눈다. 어쩌다 저녁에 다른 일이 생겨 자전거로 퇴근하지 못하는 상황에도 걱정 없다. 전철에 싣고 이동하기도, 택시 뒷좌석에 싣기에도 눈치 보이지 않는 크기이다.


그런 일상을 산다. 브롬톤을 도시의 이동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그래서, '왜 브롬톤이야?'라는 질문에는, '그냥 이건 개인 취향이야'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다. 왠지 런던의 '데이비드'와 '로라'가 용접하고 칠했을 것 같은 감성의 브롬톤은 특유의 클래식한 멋이 이 브랜드가 추구하는 '일상 속 여유' 콘셉트에 잘 녹아들어 있다. 적게는 1-200만 원에서, 크게는 3-400만 원까지 값을 지불할 가치가 있다, 고 생각한다. 10년도, 20년도 타는 이들을 여럿 봤다.



브롬톤을 사길 꺼리는 이들은 이 것이 없어도 잘 살아왔고, 또 한 번 사면 이후 이것저것 갖추고 업그레이드하는데 돈이 많이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 브롬톤 카페의 여러 유저들은, 브롬톤을 장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비슷한 금액을 들여 꾸미고 개량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유로 그 오랜 시간 브롬톤 구입을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함께한 20여 일 동안, 이 브롬톤은 원래의 조립 상태 거의 그대로 매일의 출퇴근을 함께하고 있다. 산 것은 앞에 다는 전용 가방과 프레임을 보호하는 가죽 보호대뿐. 가고, 서고, 접어서 사무실 한편에 두는 온전한 그 기능을 위해 필요한 모든 부품은 이미 다 달려서 나온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p.s. 개인의 취향이라는 답은 역설적이게도, 그런 일상을 위해 필요한 자전거는 꼭 브롬톤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니벨로 자전거를 구입하고 싶다면 브롬톤을 비롯해 다혼(Dahon)이나 턴(Tern), 국내의 티티카카와 같은 여러 전통 있는 메이커들이 있으니 가격과 감성, 목적에 맞게 구매하길 추천한다. 하지만 유사 브롬톤과 같은 카피 제품이나, 지나치게 저렴한 출처가 불분명한 제품은 내구성이나 사후 관리 등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라도 왔으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