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다 분주히 돌아다닐 때, 천천히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한가운데에서 역할을 찾아 움직일 때, 가만히 등을 벽에 기대고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 빈 손이지만 이 사람은 두 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게으름뱅이일까요, 방관자일까요, 아니면 욕심쟁이일까요? 남들과 다르게 움직이며 분주히 장면을 기록하는 사람. 그는 기자(記者), 즉 촬영사입니다.
사실 기자와 촬영사(撮影師)는 그것을 지칭하는 범위와 범용(凡用)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이를 가리킵니다. 장면을 기록하느라 그 장면 밖에서 전체를 봐야 하고, 때로는 순간을 멈춰야 하며 한 프레임(frame) 안에 모습을 함축해야 합니다. 내가 담기지 않아도 아쉬울 것 없지만 좋은 장면은 놓치기 싫어하는 사람. 그래서 모든 이벤트(time)가 끝나면 쓰레기는 치워 없어져도 무엇 하나 버릴 것 없는 시간 무더기가 남아 마음은 가볍고 책임은 더 무거워지는 그런 사람.
마케터로서, 특히 영상이나 카피라이팅 같은 콘텐츠 창작 위주의 일을 하면서 누군가는 '재능 장비'라고까지 할 정도로 우리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일을 즐겨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왜 어머니 집에 들르면, 가끔 옷장에서 앨범을 꺼내 보며 보고 또 봤던 사진도 정겹고 즐거운 경험이 있잖아요? 우리의 활동을 영상에 담고, 그걸 약간의 기재를 발휘해 악마의 편집(?)을 하고 함께 돌려 보며 웃던 즐거운 경험은 멋진 여행을 다녀와서도 한 동안은 사진이며 영상을 보며 그 여운에 잠겨 서서히 일상으로 회복하는 추억의 페이드 아웃 같다는 생각도 하곤 했습니다. (켜고 끄는 스위치가 작동을 잘하는 사람과, 너무 뻑뻑하고 무거워 잘 되지 않는 사람 중에 후자라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과거 콘텐츠 만드는 일이 좋아 만든 사내 동호회 '크리에이터스'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숏폼이 아직은 대세가 아닌 시기였지만, 이미 5분을 넘어가면 너무 긴 콘텐츠가 되어버린다는 정성적인 느낌은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활동, 예를 들어 어반스케치, 문화 여행, 캠핑, 캘리그래피 등을 사내 재능공유 형식으로 나누며 그 장면을 영상에 담았습니다. 담는 시간만큼이나 5분 내외의 영상으로 만드는 일은 오래 걸렸습니다. 하지만 상업이 아닌 나와 내 주위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편집을 해본 이들은 공감하겠지만, 그것은 결과물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크리에이터스를 운영하며 많은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글의 매력은 영상과는 또 다른 차원 혹은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 영상을 틀어놓고 보다 보면 젖어드는 속도가 글과는 매우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편집이 있어도, 영상 안에는 미처 신경 쓰지 못해 담긴 자연스러운 모습들이 있습니다. 글은 충분히 각색이 가능하므로, 어쩌면 영상이 더 날것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글을 읽으며 감성에 젖어드는 속도가 마치 잔잔한 비를 맞는 것과 비슷하다면, 영상은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최근 너무도 힘든 일이 있어 자괴감이 들며 헤어 나오지 못할 때, 참 시기적절하게도 크리에이터스 올드 멤버들과 만남이 있었고, 오래전 영상을 함께 보며 "아, 이때는 정말 어렸네"라든지, "이 장면은 너무 좋다, 기분 좋은 경험이었어"와 같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면서, 그 때 함께했던 소중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밝았던 나 스스로를 발견하면서 다시 한번 열심히 잘 살아볼 힘을 얻습니다. '과거를 돌아볼 새 없이 숨 가쁘게 달려가기도 바쁜 세상'에 살면서도, 지칠 때면 좋은 것들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으라고 신은 우리에게 기억과 망각을 함께 주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어쩌다 누군가 나의 모습이 담긴 사각형 장면을 건네면, 그 시간 함께 한 순간인데도 문득 어색함 밀려드는 그런 사람. 오늘도 한편에서 무대 중앙을 응시하는 것이 장면 속 누군가보다 더 익숙한 사람. 누구도 호명(呼名) 하지 않고 눈길을 주지 않아도, 그 사람의 눈 보다 사후(事後) 자신의 모습이 더 궁금한 사람들이 있어 존재하고, 그들의 즐거움이 곧 일의 보람인 그런 사람 중 하나라서 행복한 오후입니다.
몇 해 전 한 행사장에서 영상을 촬영하는 기사분을 보고 든 소회였습니다. 비록 바깥 날씨와는 상관없이 내 마음이 춥거나 지독한 열사병에 걸린 것처럼 힘들 때, 영상은 봄 철 비로소 영상의 기온을 회복한 때처럼 새로운 삶의 의지나 희망과 같은 꽃망울을 위한 훈풍이 됩니다.
보이는 것, 보이는 사람, 그곳의 의미를 담는 게 즐거워 어느새 내가 없는 장면이 더 익숙해, 이렇게 보이는 내 모습이 어색할 때가 가끔 있다
이 글은 HR플랫폼 원티드 인살롱에도 기고되었습니다.
참고.
OCG Film: https://www.youtube.com/@ocgfilm95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