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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Oct 14. 2024

카페 쿠즈 이야기

khoose : choose a kind

좋았던 영화의 엔딩 크레딧 같은,


그런 공간이 있다. 모두가 날 떠나도, 잠시 혼자라도 더 머물고 싶은 이 공간에서 난 글을 썼고, 꿈을 키우고, 인연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모두 물 대신 진정한 마음을 줘야 잘 자랄 수 있는 가녀린 꽃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서너 평 남짓의 이 공간은 내게 볕 든 정원이거나 바람 드는 온실이었다. 송파동 주택가 골목에 자리한 작은 카페 '쿠즈'가, 가을 한창인 2024년 10월 13일 이곳에서의 마지막 날을 맞았다.



어느 여름날. 친구를 기다리다가 들어선 낯설지만 왠지 걷고 싶은 골목에서, 무더위에 지쳐 잠시 쉬기에 편해 보이는 공간을 발견한 것이 시작이었다. 차분한 톤의 벽돌 건물 1층 코너에 자리한 카페의 분위기와 쿠즈(Khoose)라는 이름, 그리고 간판에 이끌렸다. 그날 시켰던 카푸치노와 수제 치즈케이크 맛도 좋았다. 그래서 한 시기에는 거의 매주 그곳에 들러 매번 다른 메뉴를 주문했다. 나의 최애는 그 중 플랫화이트다. 카푸치노와 라테의 중간 정도, 에스프레소보다는 덜 진한 커피에 풍부하고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조화롭다.


어떤 날은 차로, 어떤 날은 자전거로, 어떤 날은 스쿠터로, 또 어떤 날은 걸어서 카페에 갔다. 집에서 적당한 거리라 외출하는 느낌도 좋았다. 주말 낮에 대체로는 쿠즈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어쩌다가 몇 개월만에 다시 갔을 때, “요즘 무슨 일 있으신가, 왜 안오시나 했어요”라고 반기는 사장님으로부터, 쿠즈가 왠지 멀고 험한 길 돌아온 따스한 집 같다는 생각을 했다.



카페의 분위기는 지나치게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균형 잡힌 '적당함'이 특징이다. (적당한 것도 특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한) 실내를 잠시 둘러보면, 공간을 가꾼 이의 단순한 미학을 엿볼 수 있다. 벽은 은근한 오프화이트 색상이고, 몇 개의 조명과 우드톤의 테이블이 분위기를 이루는 것의 전부다. 공간을 꾸민 사장님의 이 정도 인테리어 감각이면 커피 맛은 보지 않아도 결코 실망스럽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역시나, 카페의 감성 나머지 부분은 고상한 커피와 정성의 케이크가 채운다.



이 공간에는 닫으면 빛의 따스함을, 열면 커다란 개방감과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통창이 있다. 덕분에 마치 나무에 열린 감을 내려 줄에 꿰듯, 가을을 한 껏 느끼며 글감을 잇고 엮기 좋았다. 가장 좋아한 자리는 통창을 바라본 벽 테이블이다. 바깥 풍경이야 별난 것 없지만, 창을 열어도 시끄럽지 않은 골목이라서 집중하거나 쉴 때 모두 괜찮다.


그리고 언젠가, 멀리서나마 잘 지내길 기원하던 그이도 쿠즈에 들러 그 자리에 앉았다 간 걸 알게 됐다. 그이가 잠시 머물던 그 자리가 그래서 좋았고, 더 집착해 거기 앉았다.



"쿠폰도 가져가세요?"


쿠폰을 모아 보관해주던 사장님은 그것을 잘 가져갈거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위치만 달라질 뿐, 카페의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모든 가치를 고스란히 옮겨 새 터에 심을 계획일텐데 쿠폰이 대수일까? 쿠폰을 물었던 이유는 그것에 담긴 이야기가 무료 커피 한 잔 보다 더 값지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 사장님은 내게 쿠폰을 달라고 하지 않고 자신이 보관함에서 별도로 표시해둔 쿠폰을 꺼내 스탬프를 찍어주기 시작했다. 으레 '내 이름이 적힌 쿠폰이겠거니'했는데, 문득 ‘사장님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싶어 의아했다. 사장님이 보여준 쿠폰에는 내 이름 옆에 다른 이의 이름이 하나 더 적혀 있었다. 앞서 창가에 머물렀던 반가운 이가, 나중에 다시 들러 쿠폰에 자신의 이름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렇게 함께 도장을 모으게된 쿠폰은, 우리가 만나지는 못해도 이 공간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는 유일한 증거가 되었다. 그래서 버리지도, 쓰지도 못한다. 이제 그 쿠폰은 쓰는 용도보단 쌓는 용도고, 닦아도 지워지지 않을 걸음의 흔적이다.


쿠즈는 지나다 우연히 들른 것을 시작으로 계절이 네 번 바뀌는 동안 자주 가게 된 두 번째 공간이다. 첫 번째는 동네의 작은 성당이다. 우연히 들른 성당이 이제는 주말마다의 쉼이자 채움의 공간이 되었듯, 쿠즈는 내게 그런 시작과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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