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회사원의 공유 오피스 임대기 (2)
에디터는 수도권에서 머나먼 남쪽 신도시 거주자다. 주중에는 강남에 위치한 회사까지 매일 왕복하는 거리가 100km 정도이고 하루 대중교통 이동 시간은 대략 세 시간, 버스와 전철을 각각 네 번 타고 출퇴근을 한다. 부지런한 신도시 사람들을 따라 일찍 버스를 타고 이동하니 회사에는 대체로 1등 출근이다. 그래서 그동안은 업무 시간 전, 약 두 시간 정도의 여유 시간에 주로 콘텐츠 기획이나 글 쓰기 같은 집중이 필요한 일을 했다. (다니는 회사의 근무 시작시간은 오전 10시부터이다.) 잠시의 여유가 생기면 운동 보단 생각을 많이 하고, 부족한 운동량은 간혹 버스를 놓칠까 봐 달리는 것으로 채웠다. 그렇게 집이 먼 사람의 긴 하루가 마무리될 즈음에는 에너지가 방전되는 속도가 남다르다. 육체적 정신적 피로감에 해야 할 많은 일들을 미룬 나의 남은 시간은 따뜻한 이불과 푹신한 소파가 채운다. 집은 그런 쉼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서른 중반에 아직 꿈을 꾸는 비 현실주의 회사원이다. 사실 20대였던 시절엔 꿈이 뭔지 모르고 살았지만, 여러 사정상 늦깎이 인생이 된 지금은 다행히 조금 뚜렷해졌다. 하지만 자꾸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조급함은 많은 고민으로 연결되고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목표를 향해 마음만 앞서 달려가니 쓸데없이 숨만 찬 하루하루의 연속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사회인이니, 이루고 싶은 또 다른 꿈을 꾸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그렇게 삶 속 적당한 타협이 익숙해질 무렵에 현실에 적응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많이 불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스스로의 성향을 깨닫고, 그간 목표하던 것들을 이루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변화를 싫어해서? 시간이 없어서? 다른 관심사가 있어서? 나태해서? 수많은 가능성 중 시간이 없다 혹은 나태하다는 이유가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진짜 답은 나의 생활 패턴 속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전과 후, 남는 시간에 주로 무엇을 하나 떠올려 보니 모임, 외식, 소파, TV, 쉼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나태와 환락의 시간들 틈바구니 어딘가에 분명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운 시간은 있었을 것이다. 오가는 버스, 카페, 거리, 화장실 등, 꼭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지나는 생각들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에, 공간의 분위기, BGM 혹은 공감의 대화 속에 여러 영감이 떠올랐던 것 같다. 때때로 그것을 메모하여 생긴 수많은 생각의 결과들. 메모장에 남아있는 그 꿈의 조각들은 다만 언제 깨어날지 모를 동면(冬眠) 중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꿈은 꿀 때 달콤하지만 깨면 아쉽다.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상상은 수도 없이 해 왔지만, 답답한 것은 여전했다.
에디터는 주로 IT업계의 프로덕트 마케터 혹은 콘텐츠 빌더로 경력을 쌓다 보니 사적인 채널로 자주 관련 내용의 문의를 받는다. 이 일을 꿈꾸고 실행에 옮기기 전에도 그런 비 공식적인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면 할수록, 현실적으로 마케팅 인력을 따로 갖추기 힘든 영세 사업장은 그 컨설팅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 사실 어렵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 시간과 자본, 관련 전문성이나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모두의 꿈을 실현할 상생 프로젝트를 기획해보기로 했다. 아직은 모호한 목적지는, 일단 첫 발을 내딛고 찾아보기로 했다.
고민 끝에 계획이 구체화되었지만 그것을 실현할 시간이 없었다. 본업이 있는 회사원에게 다른 일을 하도록 허락된 시간은 평일 저녁, 그리고 주말뿐이다. 그간 평일 저녁엔 내일로, 내일은 주말로 미루던 패턴에서 벗어나 진지하고 진정성 있게 그 일을 해야 했다. 주로 나태한 일들이 벌어지는 그 공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독서실, 비즈니스 센터, 공유 오피스 등 월 단위로 임대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보게 되었다.
처음엔 적지 않은 월 고정 임대료가 부담스럽게 다가왔으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은 요즘 1인 창업자들에게 인기 있는 공유 오피스가 제격이었다. 그리고 생각하면 할수록 공유 오피스를 임대해야 하는 이유는 더 명확해졌다. 이 계획을 말하니 가족을 포함해 주위의 반대 의견이 많았다. 꿈이 있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 회사원이 다른 사무공간을 임대한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했다. 더군다나 월 임대료가 웬만한 학원이나 운동 강습비보다 비싼 금액이므로 직장인이 고정 비용으로 지출하기에 다소 부담스러운 수준일 거라고 염려했다. 그래서 공감의 과정이 필요했다. 가족들에게 나의 꿈,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들, 집과 회사에서 할 수 없는 이유, 비용 투자가 가져다 줄 책임감, 그간 저녁 시간에 낭비하던 소비 패턴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고 나중에는 이 생산적 투자를 가족 모두 이해했다.
저녁이 있는 삶을 시작하는데 더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다양한 브랜드의 여러 공간들을 살펴보고 강남역 인근 한 공간을 선택했다. 2018년이 저물어가던 늦겨울 어느 날부터 시작된 행복한 고민의 결과였다. 이 곳은 크진 않지만 아담하고 캐주얼한 공간이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버스 환승이 편하다는 점은 신도시 거주자인 나로선 가장 중요한 요건 중 하나였다. 아침 여덟 시부터 밤 막차 시간까지. 그렇게 나의 꽉 찬 하루가 시작된 것은 1월 둘째 주 화요일이었다. 그렇게 내 삶 속에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버스로 강남역과 집을 오가는 이동 시간에는 주로 부족한 잠을 청하게 되었다. 눈을 뜨고 하차하면 맞은편에 오늘의 첫 출근지가 보인다. 오가는 바쁜 사람들 무리에 뒤섞여 논현역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나뉘는 첫 갈림길. 한 무리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다른 무리는 다시 전철역 안으로 사라진다. 나의 꿈이 자라는 이 곳은 특유의 플로랄 향이 좋다. 그렇게 시작한 오전 여덟 시부터 아홉 시까지 누리는 첫 번째 근무 시간에는 이 곳에서 제공하는 커피와 시리얼로 식사를 하며 간단한 작업을 한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보내고 나면 슬슬 두 번째 출근을 시작한다. 신논현에서 종합운동장 방향 9호선 급행열차 두 정거장 뒤에 나의 또 다른 일상이 있다.
또 기다려진다. 나의 세 번째 출근 시간이.
그리고 지금은 또 한 번의 저녁 8시이며, 장소는 꿈이 종착점인 9호선 신논현역에 위치한 나만의 공간이다. 오늘도 이 곳에서 몇 시간 꿈을 향에 걷는다. 이 장소가 그곳에 위치한 것은 우리의 만남이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나만의 저녁이 있는 삶 속 점점 익숙해지는 공간의 분위기와 향기. 많은 이야기들이 쓰이는 이 공간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 없어 꿈으로 다가갈 시기를 미뤄 왔다는 다소 핑계 같은 이야기의 결말로 가는 마침표가 아닌 쉼표, 이어짐의 기호였기를 진정성 있게 바란다.
공간을 채우니 꿈이 자라고, 꿈이 커가니 할 일들이 생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