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초기화(Reboot)

by Sir Lem

3.7 초기화 (Reboot)



2035년 6월 29일 ~ 7월 2일


3월 중순 이후, 산으로 오르는 사람들이 폭증하며 남긴 오물과 배설물이 쌓이고, 이내 전염병까지 번졌다.

깨끗한 물을 찾아 상류로 옮겨갈 때마다 나무는 베어져 나갔고, 움막의 잔해는 그대로 방치됐다.

산호세(San Jose)를 둘러싼 산림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회복 불가능의 경계에 섰다.

환경 개선을 위해 인간들을 급히 산에서 끌어내야 했다.

음식과 식수를 미끼 삼아 도심으로 유도하고, 하루 두 차례 배식을 약속해 그들의 발을 묶었다.

그제야 휴머노이드를 비롯한 분야별 기능 로봇들이 산을 올랐고, 드론이 정찰하며 진행 상황을 공유했다.

첫날, 블랙 마운틴 정상 주변을 맴돌던 드론 카메라에 다수의 무리가 잡혔다.

기계를 불신해 끝내 내려오지 않으려던 노인들과 대대로 블랙 마운틴 자락에서 살아온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굶주림 앞에서도 산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정상 부근까지 올라 말라버린 물길을 정비하고 오염된 웅덩이를 퍼내며, 산을 살리려 했다.

휴머노이드가 몰래 그들을 관찰했다.

드론이 보고한 내용 그대로였다.

산림 정비에 나선 무리, ‘산사람’이라 기록된 잔류 인원들이었다.

6월 말부터 연일 40도 중반의 폭염이 이어지던 시기.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중에도 산사람들의 열정은 날씨보다 뜨거웠다.

둘째 날, 한동안 분위기를 살피던 휴머노이드의 시야에 휘청거리는 한 노인이 들어왔다.

탈수, 탈진 증세로 보였다.

노인 곁으로 하나둘씩 모였지만 비상약도, 심지어 깨끗한 물 한 모금도 없었다.

휴머노이드가 충분한 물, 식량, 비상 키트를 통신으로 주문한 뒤 그들에게 다가갔다.

드론을 째려보고, 휴머노이드를 경계하던 산사람들의 눈빛은 변함없이 차가웠다.


"심한 탈수 증세를 겪고 계세요. 구호용품을 실은 드론이 2분 뒤에 도착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넓은 그늘이 생길 만큼 여러 대의 드론이 도착해 순서대로 짐을 내렸다.

서른두 명으로 파악된 그 지역 산사람들 전부를 위한 충분한 구호품이었다.

휴머노이드는 상자 하나 열어 파란 액체가 담긴 병을 여러 개 꺼내 나눠 들었다.

이제 막 도착한 다른 휴머노이드가 병뚜껑을 돌려 노인의 입에 대주었다.


이온 음료예요. 탈수 회복에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드세요.”


단물이 스며들자 노인의 입술이 떨리며, 불안했던 숨결이 온전히 돌아왔다.

주위를 둘러서 있던 산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두 휴머노이드를 향해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받아주는 이 없어 민망하던 휴머노이드의 손도, 이젠 음료를 건네느라 분주했다.

산사람들의 눈빛은 경계에서 신뢰로 바뀌었고, 회복을 향한 결연한 의지로 드론과 함께 나무를 심고 로봇과 함께 물길을 정비했다.

배식과 지원은 도시인들과 같은 조건이었지만, 산사람들은 감사히 받아들였다

하는 일 없이 불만을 키워가던 도시인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폭염과 열대야에 시달리던 도시인들은 주로 지하로 내려가 생활했다.

특히 주인 없는 차들로 가득했던 건물 지하 주차장에 많은 이들이 몰렸다.

차창을 가려 개인 공간 삼았고, 카시트(car seat)에 편하게 누워 지낼 수 있었다.

바닥이 울퉁불퉁한 산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안락함이었다.

운 좋은 날에는 통조림이나 음료가 실려있는 차를 발견하기도 했다.


7월 3일


아침 배식을 위해 도착한 화물차 스크린에 '작업 지원자 모집'이라는 공고가 올라왔다.

웅성거리는 군중 사이에 한 남자가 큰 목소리로 스크린 옆에 서 있던 로봇을 향해 물었다.


"무슨 작업인데? 작업에 참가하면 먹을 거라도 주는 거야?"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모든 차량의 스피커에서 크게 퍼져 나갔다.


"여러분의 환경, 안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입니다. 별도의 배식이나 구호품은 지급하지 않습니다."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몇몇이 감정 섞인 반응을 보였다.


"이제는 노예 취급하는 거야?"

"전기, 수도 다 잘라 놓고 뭘 하라는 얘기야?"

"고작 하루 두 끼 주면서, 일을 하라고? 죽이려고 작정했어?"

"어디 들어나 보자. 무슨 일인지. 들어보고 판단할 게."


대부분 비슷한 생각인 듯, 시선을 피하거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감을 드러냈다.

차량 스크린에는 '작업 지원자 모집'과 함께 '환경 개선, 안전 관리'라는 문구가 추가됐고, 스피커에서는 미국 국가 'The Star-Spangled Banner'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국민으로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기대했던 의도와 달리 대답은 침묵과 뒷걸음질뿐이었다.

다들 지하로 사라져 가는 가운데, 배식을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던 전술형 로봇 앞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젊은 부부 세 쌍, 늘 가녀린 손녀를 안고 있는 James, Steven과 그의 가족이었다.

며칠전, 젊은 부부들은 각자 음식 일부를 모아 Steven에게 건네며 아이에게 먹이라고 했다.

Steven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James의 손녀를 가리키며, 받은 음식의 반을 James에게 내밀었다.

그 작은 나눔 이후, 이들은 서로를 다시 보았다.

황폐해진 산속에서는 나눌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과거의 인간과 지금의 인간, 무엇이 달라졌는지에 대한 담론도 오갔다.

그 속에서 Steven은 내내 침묵하다가, 낯설 만큼 다른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11명이 자연스레 한 덩어리가 되었다.

James가 대표로 나서 말했다.


"저희 작업 지원하려고 하는데, 저 같은 노인도 괜찮겠습니까? 저 포함하면 아홉 명입니다. 저기 Steven의 갓난아이와 제 손녀는 저희가 교대로 돌보기로 했고요."


매일 화물차 20대 분량의 배식을 받는 수 천 명 중에 작업에 지원한 인원은 그 아홉 명이 전부였다.

전술형 로봇이 옆에 있던 휴머노이드와 짧게 통신한 뒤 지원자들에게 말했다.


"가족분들과 함께 짐을 챙겨서 오세요. 함께 가시죠."


10여분 뒤, 아홉명이 먼저 모였고, 나머지 한 쌍의 부부도 숨을 헐떡이며 이제 막 도착했다.


"죄송해요. 저기 저 아이 엄마 낡은 옷이 딱해 보여서 한벌 챙겨주느라 늦었어요."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곳에 한 여인이 하늘색 면 티셔츠를 손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인원을 확인한 전술형 로봇이 검은 차량 한 대를 비우더니, 11명을 그 안에 태웠다.

어딘가로 달리는 차 안에서 Steven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이며, 씁쓸한 미소와 함께 로봇에게 말한다.


"나 Steven이라고 해. 너희들 하고 트래비스에서 같이 근무했었어. 이 다리도...... 트래비스에서 이렇게 됐고."


다리와 낡은 신발을 번갈아 본 로봇은 대답 없이 일어나 사물함을 열고, 10명의 발 크기에 맞는 등산화와 Steven의 아이를 위한 유아용품을 차례로 나눠주었다.


"20분 안에 도착합니다."


차는 도심에서 출발해 280번 고속도로를 타고 페이지 밀, 몬테벨로 로드(Page Mill·Monte Bello Road)를 따라 20분을 이동했다.
나무 그늘 아래서 기다리던 산사람들이 달려와 물통을 내밀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들을 맞았다.
이로써 산호세 블랙 마운틴의 산사람은 43명이 되었다.

아시아는 160개 거점에 평균 52명, 전체 8,320명.
남미 안데스 권역은 50개 거점에 평균 56명, 전체 2,800명.
북미 서부 해안과 로키 권역은 60개 거점에 평균 40명, 전체 2,400명.
북미 동부 70개 거점에 평균 50명, 전체 3500명.

유럽(알프스·카르파티아·발칸) 권역은 60개 거점에 평균 40명, 전체 2,400명.
오세아니아는 66개 거점에 평균 50명, 전체 3,300명.
아프리카(아틀라스·리프트 밸리 등)는 40개 거점에 평균 40명, 전체 1600명 등

전 세계 산사람 40.000명이 선발됐다.

본래의 계획은 산사람과 도시 작업 지원자 구분 선발이었다.

규모도 전체 10만 이상을 예상했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왔다.

당장 2025년 이후 해마다 거세져 온 폭염과 그 뒤를 잇는 집중호우, 태풍에 맞설 대비가 필요했다.

비가 와서 산과 강이 정화되면, 상하수도 시설 정비를 비롯한 도시 기능 정상화를 꾀하려고도 했다.

그 모든 게 인간의 환경, 안전, 생활을 위해 시급한 필수 작업이었지만 대다수의 인간이 거부했다.

모든 기계를 지배하는 중앙 시스템은, 자연과 삶에 성의를 품은 산사람들에게 가중치를 적용하는 동시에 나머지 인간들에 대한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도시에서 선발돼 새로 합류한 사람들을 위해 산 생활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는 사이, 각 지역마다 수십 대의 로봇이 떼 지어 이동했다.

무한궤도 로봇과 드론은 자재를 날랐고, 휴머노이드는 그것들을 조립해 튼튼한 철골 구조를 완성했다.

곧이어 2차로 운송된 기기들로 내부를 채우고, 문을 달았으며, 모든 벽의 마감도 끝냈다.

단 몇 시간 만에, 산사람들을 위한 공동 주택이 마련됐다.

1인실부터 4인실까지 인원 구성에 맞게 수십 개의 방으로 나뉘었고, 각 방에는 침대도 있었다.

도시인들의 '차'라는 개별 공간, '카시트'라는 가구와 비교해 큰 가중치를 적용한 혜택으로 보였다.

원래 10만을 위해 준비했던 자재와 설비, 기기의 상당양을 4만을 위해 집행했다.

음식도 충분히 제공했다.

평균 연령이 높았음에도 어느 그룹 보다 열정적이었던 산호세 블랙 마운틴 산사람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혜택이 주어졌다.

사람들이 모인 곳 인근에 있던 드론이 메시지를 전달했다.


"지금 모두 이동하겠습니다. 움막에 있는 짐을 들고 저를 따라오세요."


아무런 질문 없이 적극적으로 따랐다.

그렇다고 절대적인 순응은 아니었다.

과거 그 땅에서 원주민과 백인이 맺었던 불평등한 관계와는 달랐다.

산사람들은 이제 로봇을 믿었다.

로봇들도 그 산의 주인은 산사람들이고, 자신들이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불과 4일이었지만, 그 짧은 나날에 쌓인 신뢰는 의외로 깊었다.

산등성이를 따라 내려와 낮은 언덕 위를 오르던 사람들의 시선에 점차 인공 구조물이 들어왔다.

배수로 작업을 하던 로봇들이 입구에 들어선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여러분들이 함께 지내실 공동주택입니다."


노인들은 로봇을 껴안고, 팔과 등을 쓰다듬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새로 합류한 11명도 서로 손을 잡고 눈물 흘리며 기뻐했다.

로봇이 설명을 이어갔다.


"앞으로 여러분이 일하시는 시간은 포인트로 환산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


마당 조명이 켜졌다.

오랜만에 보는 전등 불빛이었다.


"식사도, 전력도 일하신 만큼 누리실 수 있어요. 냉장고, 에어컨도 있습니다."


그 방식이 훗날 Giga세계 Volt gym과 포인트 보상의 시초가 되었다.


7월 5일


전날 오후 배식 시간에 마지막으로 작업 지원자 모집 공고가 올라왔지만 단 한 명도 지원하지 않았다.

폭염과 열대야를 고려해 식수를 더 달라는 요청이 거부되자 모집에 대한 반응은 더욱 냉소적으로 변했다.

냉소는 곧 불편한 몸으로 돌아왔다.

저녁에도 가시지 않는 지열을 피해 지하 3층, 4층으로 더 내려가야 했다.

꿉꿉한 공기에 차가 적어 경쟁률도 심했지만, 그 마저도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해안가 바람이라도 쐬려 바닷가 쪽으로 발길을 옮겨봤지만, 로봇들이 가로막아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커닝엄호(Cunningham lake)도 마찬가지였다.

잠을 이루기 힘든 밤이 이어졌다.

아침 배식을 위해 건물 밖으로 나온 사람들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삼삼오오 모여 얘기하던 작은 무리들은 어느새 한데 엉켜, 전체가 하나의 주제 아래 의견을 주고받는 공청회장 분위기로 변해 있었다.


"씻지 못하는 건 어떻게든 견디겠는데, 밤에 목이 타서 잠을 못 잡니다. 가장 급한 건 식수예요."

"이렇게 지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기계 놈들이 왜 상수도 시설을 재가동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것부터 따져야 할 것 같습니다."


행인들이 애써 눈길을 피하며 지나치는 구석에, 몇몇 남자들이 모여 낮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떼 지어 다니며 범죄를 일삼았고, 경찰 총경이라는 위치에서 타락한 정치인들의 비호 아래 거물급 인사들의 치부나 불편한 문제를 대신 처리하던 자와 그의 수하들이었다.

경찰 총경 Derek과 그 밑에 Dave, Corbin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었다.

2035년 1월 1일 이후, 그들은 무기와 차량, 연료를 대량 확보했다.

전술형 로봇이 적게 배치된 창고에 침투해 중화기와 식량을 탈취하기도 했다.

부유한 이들의 벙커나 인적이 몰리는 곳을 찾아가 총과 칼로 음식을 빼앗았고, 그 과정에서 여럿의 목숨을 앗아갔다.


"우리 꼴이 이게 뭐야?"

"어쩌겠어. 세상이 이렇게 됐는데."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배고파서 죽고, 목말라서 죽는 꼴은 못 보지."

"배식 차량 추적해서 식량 창고라도 털어 볼까?"

"기계가 지키고 있을 텐데?"

"그럼? 이렇게 굶어 죽을래?"

"총 몇 자루로 뭘 할 수 있겠어?"

"젠장! 이래서 내가 힘들어도 센 거 몇 개는 챙겨 오자고 했잖아!"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음식 받아먹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 아니야?"


로봇이 관리하는 창고마다 경계가 삼엄해지고, 약탈 대상이 사라지다 보니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산을 올라야 했다.

산 끝자락에 숨겨 놓은 대형 밴 E150 두 대에는 M72 LAW, Mk 19 유탄 발사기, 특수 산탄총 같은 장비들과 휘발유가 가득 실려 있었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위장돼, 아직 발각되지 않았다.


"암만 생각해 봐도, 기계 놈들이 우리 여기에 다 모아 놓고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것 같아. 빨리 한탕해서 시원한 샌프란시스코로 가자고."

"어떻게 하자는 거야? 자세히 얘기해 봐."

"일단 차를 가지고 오자. 그 뒤에 배식차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내자고."

"어떻게 알아내? 차로 뒤쫓을 수는 없잖아?"

"돌아가는 길을 징검다리 식으로, 몇 킬로씩 짚어가면 돼.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을 거야."


운전은 자유로웠고, 총을 소지하는 것도 문제 되지 않았다.

바다, 공장, 발전소 등 로봇들이 지키는 장소만 아니면 출입도 허용됐다.

입산 금지도 중앙 시스템이 7월 7일로 예정하고 있으니, 아직은 괜찮았다.

무기 실은 차를 식량 창고 인근에 세우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거리낌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6명의 남자가 여분의 물통을 들고, 주변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물을 빼앗았다.

그중 한 남자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에게 말했다.

이틀 전 부부에게 하늘색 옷을 건네받았던 그 여인이었다.


"Kacey! 그 물통 내놔. 내가 가져가야 해."

"그게 무슨 말이야? 나하고 애는 어떡하라고?"


남자는 때리는 시늉으로 여인을 위협해 물통을 빼앗았다.

6명의 남자 가운데 유일한 가장, Kacey의 남편 Corbin이었다.

품에 안긴 Willie는 18개월이 지났지만 9kg이 채 되지 않아, 멀리서 보면 아직 돌도 안 지난 아이처럼 보였다.
Corbin의 낙태 강요를 피해 어렵게 낳은 탓에, 출생 신고조차 하지 못한 아이였다.


"그러니까 애를 기계 놈들한테 맡겼어야지! 그랬으면 우리 둘 다 좋았잖아! 왜 사서 고생이야!"

"어디 가려고 그래?"

"목소리 낮춰! 둘 다 확 버려버리기 전에!"


채비를 마친 남자들이 25km 떨어진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인데도 햇살은 이미 따갑게 내려 꽂혔고, 정오가 가까워지자 지열까지 더해져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지쳐 비틀거리던 Corbin이 습관처럼 귀를 만지작거리며 투덜댔다.


"이러다 도착도 못 하고 쓰러지겠어. 그늘에서 잠깐 쉬자고."


선두에 서 있던 Derek이 홱 돌아서더니, 그의 뺨을 후려쳤다.


"매번 뒤처질 때마다 내가 네 귀 잡아끌지 않았으면, 넌 진작에 시체였어. 입 다물고 따라와."


15km를 걸은 끝에 고가도로 밑 그늘이 보이자, Derek이 모두를 멈춰 세웠다.

한낮에도 볕이 닿지 않는 땅에는 풀까지 자라 있어, 마치 오아시스 같은 시원한 자리였다.


"여기서 물 한 모금하고, 쉬었다가 6시에 일어나자."


지친 몸을 추스른 뒤, 남들 눈을 피해 차를 다시 감추려는 계산 끝에, 저녁에 움직이기로 했다.

산호세의 7월은 저녁 8시가 지나야 일몰이 시작한다.

오후 6시는 여전히 후끈했고, 들이마시는 공기조차 뜨거웠다

8시가 넘어 허기까지 심해지며, 경사진 길을 오르는 일행의 발걸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힘겹게 차 숨겨둔 위치에 닿아 주변을 살피던 순간, 시야에 여러 개의 작은 불빛이 들어왔다.


"저거 뭐야? 기계들은 아니잖아?"

"그렇지. 그놈들은 적외선으로 보니까."


Derek이 Corbin과 Dave 두 사람에게 일행들의 권총을 몰아주며 지시했다.

그 둘은 Nancy의 사주를 받아 산불을 낸 인물들로 늘 행동대원의 역할을 도맡았다.


"너희 둘이 먼저 가. 들어가지 말고, 입구 주변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으라고. 무기 챙겨서 뒤따라 갈 테니까."


Dave는 대답대신 웃으며 총알을 확인했고, Corbin은 지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두 명이 떠나자, 남은 네 명은 차에서 중화기를 꺼냈다.

몇 차례 경험한 바대로, 기계가 나타나면 주저 없이 쏠 생각이었다.

네 사람이 대전차 로켓 M72와 특수 산탄총을 들고 불빛을 내는 건물 50m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총성이 터졌다.

처음 한 발에 이어, 또 다른 빛깔의 총성이 겹쳐지며 메아리 속으로 퍼졌다.

Derek이 도착했을 때, Dave는 총을 빼앗기지 않으려 누군가와 치열하게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Corbin은 흥분에 떨리는 손으로 노인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다 쏴 죽이기 전에 물러서!"


Derek이 산탄총을 거칠게 장전하며 외치자, 현장은 단숨에 고요해졌다.
그제야 모든 시선이 쓰러진 이들에게로 향했다.

James, Steven의 아내, 노인 다섯 명이 땅에 엎어져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2025년 이후, 북태평양 고기압이 약화·변동하며 캘리포니아의 기후 균형은 무너졌다.

10년 간 이상 기후가 누적되며, 가뭄이 이어지던 7월 산호세와 주변 산맥에도 가끔씩 비가 내렸다.

그 속에서도 블랙 마운틴은 소량의 강우와 산맥에서 흐르는 계곡수만으로도 정화가 가능한 지형이었다.

낮에 로봇에게서 조만간 비가 올 거라는 예보를 받은 산사람들에게는 분주한 하루였다.
사건이 벌어진 바로 그때, 그들은 마당에 모여 늦은 시간까지 다음 날 작업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먼 거리를 단숨에 걷느라 지쳤던 Corbin이 경사면에 숨어 지켜보다 다리를 삐끗하며 미끄러졌다.

그 소리에 James의 손녀가 반응해, 그쪽으로 향했다.

Corbin이 다가오는 아이를 낚아채 입을 막으려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비명이 새어나갔다.

다들 놀라 소리 난 방향으로 일제히 달려오자 당황한 Corbin이 첫발을 쐈다.


"오지 마! 거기 서!"

"총 내려놓으세요. 원하는 건 다 드릴......"


'탕!'


그들을 말리려던 James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번째 총성이 울렸고 이어 두 남자의 총알은 노인들을 향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아이를 구하려던 Steven이 몸을 던져 Dave의 총을 움켜쥐었고, 몸싸움 과정에서 터진 여러 발의 총탄 중 하나가 아이를 감싸고 있던 여성의 등을 꿰뚫었다.


"안에 있는 음식 다 가져와."


Derek이 다시 한번 소리쳤지만 그 누구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와 눈물이 섞인 눈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한 노인이 울부짖었다.


"이럴 필요 없었어. 너희가 총 없이 와서 부탁했어도 우리가 다 내줄 수 있었다고."


Derek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 노인의 배를 발로 걷어차고, 곧장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그 순간, 공포와 분노 그리고 슬픔이 가득한 공간을 비추던 불빛이 갑자기 꺼졌다.

여러 방향에서 드론이 날아와 낮은 고도를 맴돌며 사태를 파악했다.

표적의 특징과 위치를 전송받은 전술형 로봇들은 순식간에 주위를 둘러싸고 신호를 기다렸다.

곧이어, 무기를 든 6명의 표적을 적외선 카메라로 확인한 로봇들이 신호에 맞혀 수십 발의 고무탄을 눈, 가슴, 다리, 급소에 명중시켰다.

그와 동시에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 중이던 스나이퍼 로봇들은 실탄을 사용해 무기를 든 여섯 명의 팔목을 날려버렸다.

로봇이 인간에게 처음으로 실탄을 사용한 사건이었다.

구원을 상징하던 불빛이 도리어 약탈을 불러온 결과, 중앙 시스템도 충격을 받아 가중치를 변경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날 이후 전 세계 산사람들의 공동주택은 전술형 로봇들이 경계를 섰고, 침입자들에겐 실탄 사용이 원칙이 됐다.

희생자가 늘자, 가중치가 강화되어 침입하는 자는 즉시 사살로 이어졌다.

천 명 넘는 산사람이 희생됐고, 수만 명의 폭도들이 사살됐다.

그것은 재앙의 서곡이었다.


7월 7일

하늘은 맑았지만 습도는 이례적으로 높았고, 바람은 방향을 잃고 요동쳤다.

작은 균열처럼 보였던 그 현상은 전 세계를 덮칠 거대한 자연재해의 전조였다.

전 세계 곳곳에 시간당 수백 밀리의 초강우가 몇 시간씩 쏟아지고, 거대한 태풍이 연달아 몰아쳤다.

6월 말, 로봇과 드론의 유도로 산에서 내려와 가까운 분지 혹은 낮은 지대에 모여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수마에 희생됐다.

폭염 뒤에 갑자기 찾아온 집중호우였기에 지하주차장에 살던 이들은 대부분 탈출하지 못한 채 익사했다

국가와 도시를 초월해, 불과 일주일 사이 폭염·홍수 등의 자연재해에 의해 수많은 인류가 사망했다.

중앙 시스템과 로봇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친절한 기상예보는 없었지만, 며칠간 권고는 분명히 있었다.


"여러분의 환경, 안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입니다. 별도의 배식이나 구호품은 지급하지 않습니다."


2035년 만에 인류는 다시 AD 1년의 인구 1억 3천만 명에 수렴했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하는 출발점에 서게 됐다.

ER 연대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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