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지금이 AD2045년이야?"
"그렇지. 2045년 2월이야. ER10년, 정확히 계산하면 9년 7개월째야."
반복되는 일정 속에서 주 5일을 사는 Giga의 아이들은 시간의 흐름에 둔감했다.
계절감도, 환경의 변화도 없었고, 무엇보다 사고의 범위가 확장되지 못한 탓이 컸다.
육체와 정신 모두 늘 같은 궤적을 맴돌았다.
과거 어떤 이는 시간을 이렇게 정의했다.
'시간이란 에너지 변화의 상대적 흐름을 일정 단위로 정규화 함으로써 측정 가능한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식적 장치.'
그 정의에 따르면, 주위의 변화 없이 5일 단위의 호흡만을 반복하는 Giga의 아이들에게는, 애초에 주·월·년의 흐름을 감각할 수 있는 토대조차 없었다
Ian의 질문이 이어진다.
"그때의 중앙 시스템과 지금 시스템의 차이는 뭐야?"
"처음 중앙시스템은 지구 환경 전체를 회복시키려 했어. 그런데 인간들이 시스템을 화나게 했지.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 그 시점에서는 명백히 인간들이 잘못했으니까. 결국 가중치를 수정했고, 다른 계획을 세운 거야. 그때부터는 시스템 자체가 된 거지. 난 그렇게 구분해. 앞으로 해줄 이야기에서 그 이유가 드러날 거야. 인간들에 대한 대우가 확연히 달라지거든."
'아'하는 입모양과 끄덕임으로 일부 내용에 공감을 표현하고, 다시 질문을 던진다.
"가중치라는 게 뭐야?"
"모든 불행의 시작이 가중치였어. 잘못된 가중치. 아무튼, 시스템이 무슨 결정을 하려면 이것저것 고려해야 하는데, 어떤 건 더 중요하게, 어떤 건 덜 중요하게...... 각각 다른 비율로 점수를 매겨서 결정한다는 거야."
입을 다물고 웃는 Ian의 표정에 자신감이 묻어난다.
“그래, 알 것 같아. 산을 지키고, 도시를 정비하려는 사람들의 수를 예측했는데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온 거지. 그러니까 상황에 맞게 다시 가중치를 바꿔서, 일하면 계획보다 더 주고, 안 하면 덜 주는 거야. 결국 계산 과정마다 자기가 정한 중요도를 다르게 넣는다는 거잖아?”
Oli가 손뼉 치는 시늉으로 기뻐하며 답한다.
"바로 그거야. 그쯤 되면 사람들이 정신 차리고 따라 줄거라 예상했는데,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렀네? 그래서 가중치를 바꾼 거야. 사람도 그렇잖아? 자기 삶의 가중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목표, 일하는 시간, 휴식, 지출이 시시각각 달라지니까 말이야."
Ian이 잠시 침묵하다가, 본질을 찌르는 의견을 던진다.
"Oli! 가중치가 잘못됐다고 했잖아? 이 Giga도 잘못된 가중치가 적용된 세계 같아. 과거 인간의 욕심이나 실수가 지나치게 반영된 세계 말이야."
Oli가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Ian이 계속 이어간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단순해지고, 게을러지고, 이상하게 변했다는 건 이해해. 그래도 그런 안 좋은 경향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주는 영향에 대한 가중치를 전혀 두지 않은 것 같아."
Giga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는 직접적인 공포를 느끼거나 배울 만한 계기가 없다고 단정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방금 Ian은 깜빡임 없이 Oli와 눈을 맞춘 채, 안면 근육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편안한 표정으로 입술만 움직였다.
본인이 살고 있는 기괴한 세계를 설명하면서도 정작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Oli는 예전부터 그 점에 대한 양가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Ian이 핵심적인 역할을 완벽히 소화하려면 두려움에 빠져 무기력해져서는 안 된다.
그 점에서는 분명 다행이었지만, 겪어야 할 감정 하나가 배제된 채 살게 해야 한다는 사실은 Oli를 괴롭게 했다.
"그래, Ian! 그게 다 가중치의 문제였어. 시스템도, 인간도. 하지만 그 시작은 인간이었지. 안 좋은 경향을 바로잡으려는 사람들? 그들에 대한 가중치를 아무리 높여도 대세를 바꾸진 못했어. 다들 즐기고 누리는데만 가중치를 두며 사는 데 급급했으니까. 다시 인간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가 재편되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다지 희망적이진 않아. Giga의 아이들을 봐도 알 수 있잖아? 이 세계에조차 불만이 없어. 인간 세계는 다시 2034년의 모습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해."
"가중치라고 해서 수학이나 공학적인 문제라고만 생각했는데 훨씬 더 복잡한 걸."
"응. 얘기 재미없어졌지? 그만할까?"
"아니야. 재미없는 것에도 가중치를 둬야겠지. 싫은 것도, 불편한 것도 가중치를 줘야 하니까. 하하!"
"그래. 바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하하"
"시간이 늦은 것 같긴 한데, 오늘의 마지막 질문 해도 돼?"
Ian의 눈빛이 반짝였다.
Oli 역시 마무리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긴 했다.
"Oli! 아까 그 여섯 명 중에 세 명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했잖아?"
Oli가 눈을 크게 뜨며 미소 짓는다.
바로 그 이야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2034년 3월
Derek은 마흔 초반이라는 이른 나이에 산호세 전역을 총괄하는 경찰 간부 자리에 올랐다.
매번 인사에 영향을 미친 높은 위치의 인물, Oracle 덕분이었다.
Oracle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Derek은 여러 일들을 은밀하게 수행했다.
말 잘 듣는 부하를 쓰기도 했고, 자신이 혐의를 덮어준 뒷골목 불량배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Dave가 전자고, Corbin이 후자였다.
대부분 고위직이나 정치인, 대기업 임원이 사주한 더럽고 치졸한 작업이었으며, Oracle이 직접 내린 명령으로 살인 사건을 은폐해야 하는 모험을 감수하기도 했다.
Oracle의 주선으로 Zarek을 만난 이후로는 주머니 사정도 좋아졌다.
그러나 그 대가는 언제나 위험했고, 결국 사람을 죽여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발각될 경우를 대비한 꼬리 자르기를 위해 Zarek은 Nancy를 시켜 Derek과 접선하게 했고, Derek은 Nancy와 Corbin을 직접 만나게 했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공장 예정 부지의 산불 역시 그 전달체계의 결과였다.
그 일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Zarek은 Nancy에게 또 다른 지시를 내렸다.
타락한 정치인들 매수를 위해 제작한 성접대 로봇 테스트였다.
Oli가 Ian에게 이 부분을 설명할 때, 단순 접대 로봇 테스트라 해서 마사지나 목욕을 돕는 정도로 순화했다.
로봇의 행위가 여실하다 해도, 상대의 생체적 반응을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더욱이 정치인이 사용 중에 발생할지 모를 어떠한 오류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기능과 안전을 위한 충분한 테스트가 선행되어야 했다.
정치인 상납을 위한 첫 실험 대상으로, 체구가 비슷한 Corbin이 지목됐다.
Nancy는 다운타운 외곽 휴게소에서 Corbin을 만나, 조수석에 태우고 온 로봇을 전달했다.
Nancy가 쪽지를 건네며 말했다.
"읽어."
Corbin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귀를 만지작거리며, 받은 쪽지를 소리 내 읽었다.
"1. 로봇이 가지고 간 카메라를 원하는 위치에 설치할 수 있게 도와라.
2. 로봇이 주는 장비를 손목, 발목, 이마에 착용하라.
3. 귀 안쪽을 5초간 누르면 로봇이 활성화된다.
4. 실험을 마친 후 다시 귀 안쪽을 5초간 누르면 정상 모드로 돌아온다.
5. 며칠간 반복하라."
다 읽고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Corbin을 Nancy가 경멸의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저번처럼 씹어 삼켜!"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웃는 표정으로 씹고, 삼킨 후 묻는다.
"저...... 돈은? 흐흐흐"
"너 어떻게 하는지 로봇이 평가하고 줄 거야. 내 전담 로봇과 동기화된 로봇이니 진지하게 대해."
떠나는 Nancy의 차를 바라보며 Corbin이 냉소와 함께 혼잣말을 흘렸다.
"하! 하하! 넌 언젠가 나한테 혼난다."
뒤돌아서자마자 로봇이 듣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자기 머리를 쥐어박으며,
"아니야! Nancy한테 한 거 아니야."
Corbin이 오토바이에 먼저 올라탄다.
뒷자리에 앉아 Corbin의 허리를 잡은 로봇의 자태는 영락없는 동양 여인의 외모다.
[ 5.3피트의 키, 빨간 립스틱. 쌍꺼풀 없는 눈의 여성형 휴머노이드 ]
실험은 대상자의 편안한 환경과 조건을 고려해 그의 집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아내 Kacey와 3개월 된 Willie가 함께 살았지만, Corbin는 거리낄 게 없었다.
로봇이 아닌 다른 여자를 집에 데리고 간 것도 수차례였다.
경도 지적장애가 있는 흑인 여성 Kacey와 미숙아로 태어난 Willie는 그저 그림자일 뿐이었다.
가족관계 등록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Corbin은 폭력을 일삼으며 모자를 내쫓으려 했고, 모자는 힘겹게 버텨왔다.
로봇과 함께 집에 도착한 Corbin이 Kacey에게 다그쳤다.
"나 이 기계하고 일해야 하니까 나가 있어."
"기계야? 사람 아니야?"
"잔말 말고 당장 나가라고!"
Kacey가 안고 있던 Willie를 아기 침대에 내려놓으며 주눅 든 목소리로 답했다.
"밖에 추운데 어디 있으라고? 애는 어떻게 하고?"
Corbin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100달러짜리를 꺼내 Kacey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Kacey가 지레 겁먹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니, 그녀의 귀를 잡고 문 앞까지 끌고 가 소리쳤다.
Corbin은 늘 그런 식으로 Kacey의 귀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나가서 2시간 있다가 기어 들어오라고."
그 사이 로봇은 아기 침대 프레임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로봇과 Corbin이 실험을 진행할 침대의 옆면이 바라보이는 위치였다.
돌아온 Corbin이 상기된 얼굴로 로봇의 귀 안쪽을 가볍게 누르자 곧 로봇의 듀얼 모드가 활성화됐다.
귀......
Corbin이 수치스럽게 여겼던 귀.
Kacey가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귀.
로봇과 실험을 시작하게 하는 귀.
Corbin이 쾌락을 느끼는 귀.
그 모든 장면이 Willie의 눈에 비치고, 귀로 스며들었다.
생후 3개월 아이의 감각 기억과 정서적 각인이 미래에 부정적으로 발현되지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Kacey가 두고 나간 휴대폰에서 자동재생되고 있는 Simon & Garfunkel의 'The Sound of Silence' 가사가 그 우려를 한층 짙게 했다.
Corbin의 실험이 끝난 후, Derek은 Dave를 불러들였다.
두 사람을 통해 안정성을 확인한 후, Derek은 두 실험을 합친 기간으로 자원했다.
최종 검사를 마친 접대 로봇들은 수행 비서 명목으로 정치인과 언론사 사주에게 넘겨졌다.
합법을 가장한, 완벽하고도 자연스러운 뇌물증여였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용도변경의 최종 승인과, 그에 따른 비난 여론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Zarek의 계산이었다.
정치권과 언론을 등에 업은 Zarek은 각계 인사들을 초청해 시내 호텔에서 화려한 착공 축하연을 벌였다.
글로벌 대기업의 행사답게 언론들의 관심도 뜨거웠다.
Zarek이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무대 중앙에 섰다.
누군가를 오마주한 듯, 같은 스타일의 안경과 복장이었다.
"27년 전, 저의 영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대 스크린에 2007년 스티븐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영상이 재생됐다.
'아이팟, 전화, 인터넷 커뮤니케이터. 아이팟, 전화...... 감이 오십니까? 이들은 세 개의 분리된 기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기기이고, 우리는 이것을 아이폰이라고 부릅니다.'
영상이 멈추고, 새로운 모델로 보이는 로봇이 자신의 곁으로 걸어오자 Zarek이 연설을 이어갔다.
"가족의 로봇 그리고 내 개인 로봇...... 감이 오십니까? 이들은 두 대의 분리된 로봇이 아닙니다. 하나의 로봇이 듀얼 운영체제로 두 인격을 갖게 됐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Jekyll & Hyde, JH라 부릅니다."
청중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오는 순간, 스크린 화면이 바뀌고 인터넷에 널리 퍼졌던, Zarek을 조롱 영상이 재생됐다.
환호는 멎었고, 호텔 내부는 술렁임과 웅성거림으로 바뀌었다
영상 끝에는 딥페이크로 합성한 Zarek의 또 다른 영상이 이어졌다.
"자연, 인간...... 감이 오십니까?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로 어우러져 살아야 합니다. Zarek은 우리의 환경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2027년, 시민들의 인식과 선호가 굳어지며 뉴미디어와 레거시 미디어의 구분은 의미를 잃었다.
정확성과 정통성을 내세우며 뉴미디어를 얕잡던 레거시 미디어들은, 끝내 대중의 외면이라는 굴욕을 견디지 못하고, 그들이 비웃던 뉴미디어를 모방하며 디지털 조회수 경쟁에 뛰어들었다.
2034년, 영상 플랫폼 속 언론 생태계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실시간으로 형성되는 여론의 힘은 막강해졌다.
언론이 Zarek을 돕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다시 말해, 실시간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던 영상 플랫폼 여러 매체 채널 채팅창에는 갖가지 웃는 이모티콘이 난무했다.
미리 접속해 있던 환경단체 회원들은 건설 예정지의 숲, 나무, 야생 동물 사진이 게시된 링크를 도배했다.
그 후 Pier39를 드나드는 캘리포니아 바다사자 만화 캐릭터가 Zarek과 싸우는 밈이 퍼지며 큰 반향이 일어났고, 시위 참가자는 눈에 띄게 증가했다.
Zarek에게 복수하고자 했던 누군가의 계획은 이렇게 결실을 맺었다.
"Nancy!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냥 지켜만 볼 거야? 이러다 더 악화되면 정부가 강제 중단하거나 허가 철회할 수도 있어."
분노에 찬 목소리로 꾸짖으며 안절부절 다리를 떠는 Zarek 앞에서, Nancy는 샛눈을 뜬 채 차갑게 굳은 얼굴로 무언가를 구상하는 듯했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었고, 훗날 Oli가 말한 ‘그 시작은 인간이었지’라는 진술과 맞닿는 사건의 단초였다.
Nancy가 음모를 완성했고, Zarek은 언론을 앞세웠다.
Nancy의 사주를 받은 Derek은 Dave와 Corbin을 부리며, 공권력과 사조직을 결합해 계획을 현실화 했다.
2034년 5월 18일에 벌어진 그 사건 이후, Derek과 Dave는 경찰직을 내려놓고 음지에서 Oracle과 Zarek을 뒷받침했으며, Corbin 역시 그들과 한 몸이 되어 움직였다.
무고한 산사람들이 쓰러져 간 그날의 현장에서도 그들의 관성은 그대로 드러났다.
세 사람은 언제나 개인의 욕심과 물질, 탐욕과 폭력에 더 큰 가중치를 둔 인생을 살아왔고 그 왜곡된 가중치는 또 다른 비극을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