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던 날
서초동 한 대형교회를 지나며
누구를 떠올렸다.
대학시절 밤새 술 마시고 집으로 향하던 새벽 6시경, 온통 흰색이었기에 원근만으로 사물을 구분해야 했던 폭설의 풍경.
개와 사람 중간 정도의 지적생명체로 퇴화해 직립, 때로는 사족보행을 거듭하며 간신히 집 근처에 다다른 순간, 취기를 뚫고 나와 의식과 반응을 자극하는 기억의 경고.
시장과 인접해 있어 1층에는 다양한 점포들이 자리 잡고 있는, 굳이 표현하자면 큰 주상복합빌라의 대표를 맡고 계신 아버지는 눈 오는 날 새벽이면 늘 정문 앞 길에 쌓인 눈을 치우셨다.
발길을 돌려야 했다.
긴 거리를 돌아 후문으로 항하는 길에 접어들자 바닥 긁는 소리가 들려온다. 식겁해서 살짝 엿보니 희미하긴 하나 아버지의 실루엣은 아니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인물, 그 양반이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쌓일 만큼 많은 눈이 내리는 날이면 떠올리는, 지금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 양반,
소위 개척교회 목사.
부모님과 동생이 여전히 살고 있는 그 빌라에 갈 때마다 챙겨 보지만 여전히 도시공학적, 건축학적 개척은 이뤄내지 못한 듯 보이는 건물 지하 개척교회 목사.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때 듣던 목소리, 톤, 언어만 봐도 진실한 복음의 전파자임을 대번에 느낄만했던 그 양반.
생김새와 입은 행색을 보자면 만화 개구쟁이 스머프에서 가가멜을 혼내주며 스머프들을 돕던 빅마우스라는 캐릭터와 흡사했던 그 양반.
아침마다 교회 앞뿐만 아니라 시장 상인, 손님들이 다니는 길을 쓸고 눈을 치우던 그 양반.
나는 묻고 싶다.
복음이 무엇인가?
여름성경학교를 빠짐없이 출석해 금박 물린 성경책을 받은 적 있고, 사탕 목걸이를 받기 위해 외웠던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여전히 암송하며, 나름의 신학 공부로 교회를 헛으로 다는 속칭 '교회오빠' 몇몇과의 말싸움을 성령의 힘으로 이겼던 나는 그 양반의 모습 자체가 복음이라 말하고 싶다.
천국은 편하고 행복하게 영생하는 곳이 아니라 착한 이들이 있는 곳, 착한 이들이 가야 하는 곳으로 생각하고 바라는 나는 그렇게 정의하고 싶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의 교인들에게만, 입으로만 복음을 전하는, 그리고 그 대가를 예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확인이 아닌 돈으로 받는 일부 대형교회목사들,
하느님이 행하여 이룬다는 '사역'을 잘못 해석한 나머지 부동산업을 '행하여 이룸'으로써 부지와 건물을 날로 확장하고, 그 넓은 곳을 성령이 아닌 제물이 충만한 곳으로 만들어 세습하는 이들에 비하자면 그 양반은 재림예수요 그 양반의 생활이 곧 성경이다.
다시 묻는다.
복음이 무엇인가?
오병이어, 맹물을 와인으로 바꾸는 기적을 말하며 '예수가 그리하셨음에 예수를 믿어야 한다'를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셨음에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작은 희생 해야 함'을 전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 하겠으며, 천국이 어떤 모습인지 설명하며 허위과장광고 하는 것이 아닌, 선하게 살아야 갈 수 있는 곳임을 그리고 그곳에 있는 이들의 선함을 전하는 것이 복음의 전파라 나는 믿고 있다.
기도가, 헌금이, 교회 규모가 선을 말하지 않는다.
작은 지하 개척교회의 목사가 행인들을 위해 빗자루와 삽으로 길을 쓸고 눈을 치우는 일이 선함이요, 이웃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선함을 행하는 그의 마음과 모습이 복음이다.
거듭말하건대,
천국은 편하고 행복하게 영생하는 곳이 아니라 그 양반 같이 착한 이들이 있는 곳, 착한 이들이 가야 하는 곳이다.
교회에 헌금내고, 기도하고,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눈이 내리는 날,
나는 항상 그 양반을 떠올린다.
대형교회 세습, 사이비 종교 보도에 혀를 차며 그를 기억한다.
내 지금 무신론자이며 그와 수 만리 떨어진 타국에 머물고 있지만
그가 있는 그곳을 향해 외쳐 본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