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환경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자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클리셰가 있다.
'맹모삼천지교'
맹자의 모친은 자식 교육에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세 번 이사했고,
학교 옆에 정착하고 나서야 만족했다고 전해진다.
이 고사는 단순한 교훈을 넘어 오늘날 강남 8학군 높은 부동산 가격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70년대 말, 강남은 대규모 개발에도 불구하고 초기 반응은 다소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명문고들이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하고, 교통 인프라가 개선되면서 부유층의 강남행은 본격화됐다.
그 이유만으로도 ‘교육 환경’은 강력한 이동 동기이자, 자산 가치를 증명하는 기준으로 자리잡았다.
내가 태어나 서른한 살까지 살았던 동네는 아직도 당시의 모습 그대로다.
긴 세월에 걸쳐 재개발 소식만 무성할 뿐, 과거의 얼굴에 화장색만 조금씩 달리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인천의 한 재래시장 안에 살았다.
교육 환경만 놓고 보자면, 맹자의 모친이 도착하자마자 기겁하고, 급히 자리를 떴을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불량 학생들이 모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그들이 남긴 꽁초와 본드가 담긴 비닐 막걸리 병, 부탄가스 등이 나뒹구는 골목길.
친구, 선배 몇몇이 조폭으로 성장한 옛 시절 배경답다.
나도 그 무리에 함께 했으며, 그들이 전파한 어른들의 전유물을 죄의식 없이 받아들였다.
다만, 언어 학습 능력에 있어서는 내가 그들보다 뛰어났는지, 내가 쓰던 어휘나 말투는 어느새 공용의 언어가 되어 돌아왔다.
난 어른들의 대화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어른들 싸움을 구경하며, 그들이 쓰는 욕의 정확한 의미를 풀어내는 과정은 재밌기까지 했다.
한동안은 막힘없었다.
그러다 내 욕설 분석 능력의 한계에 직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앞집 황 씨 아저씨가 시장 한가운데에서 아줌마를 때릴 때마다 내뱉던 말.
"이 빌어먹을 년아"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때마다 전후 맥락을 통해 그 뜻을 알아내려 했지만,
대개의 문장이 욕으로 이뤄진, 밑도 끝도 없는 분노의 외계어 나열에 힌트는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혹은 '비러머글'
외국어 같기도 한 것이, 입에 착 달라붙었다.
그 뜻을 비로소 알게 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계기는 확실하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입은 걸었지만, 앞집 황 씨와는 다른 결의 남편 김첨지의 세 번의 대사,
"아따, 젠장맞을 년, 별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네. 맞붙들고 앉았으면 누가 먹여 살릴 줄 알아?"
"이런 빌어먹을 제 할미를 붙을 비가 왜 남의 상판을 딱딱 때려!"
"빌어먹을 깍쟁이 같은 년, 누가 저를 어쩌나, ‘왜 남을 귀찮게 굴어!’ 어이구 소리가 처신도 없지, 허허."
국어 선생님은 소설의 각 문장과 그 안의 표현들을 낱낱이 해석해 주셨다.
그 과정에서 내 오랜 의문도 자연스럽게 풀렸다.
그리고 앞집 황 씨와 김첨지의 비교라는 이해의 확장도 이뤄졌다.
아내를 향한 김첨지의 거친 언어는 빈곤과 좌절이라는 시대 상의 반영이다.
소설의 제목과 내용이 그렇듯, 아내를 향한 김첨지의 말과 행동 역시 역설적이다.
반면, 황 씨의 욕설은 분노 그 자체였다.
더욱이 그 욕은 의미가 아닌 폭력으로 직결되었다.
이미지나 직접 겪은 사례를 통한 이해는 기억에 오래 남는다.
운수 좋은 날이 시험 지문에 등장할 때 전혀 긴장하지 않았던 이유다.
더불어 '빌어 먹을'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 원인이기도 하다.
인천에서 강남으로 출퇴근하던 2003년 어느 날.
경인 고속도로 진입하기 전 신호대기 중에, 함께 일하던 친구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사장님! 오늘 꼭 좀 부탁해. 앞으로 말 잘 들을게"
친구이긴 했으나 내가 사장이었고, 수익의 일부를 지분의 형식으로 주는 관계였다.
개업한 지 1년이 체 안 되는 작은 유학원 월 수익이라고 해봐야 2,3 백만 원 정도.
데이트 비용 없다고 며칠 전부터 징징대는 꼴이 얄밉기도 했지만, 맡은 중책을 늘 열심히 하던 녀석이었기에 안 그래도 주려고 맘먹고 있었다.
다만 바로 주기보다 녀석이 아양 떠는 모습을 좀 즐기고 줄 생각이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신호대기 중에 녀석에게 문자를 보냈다.
'빌어먹을 놈'
당시 누구는 1번 우리 집, 또 누구는 1번 사랑하는 아무개 등으로 연락처를 저장했지만,
숫자 기억을 잘했던 나는 수십 개의 번호를 저장 없이 일일이 눌러 걸었다.
원래 숫자 기억을 잘했다기보다 그런 훈련을 통해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문자를 보낼 때도 '메시지 쓰기' 버튼을 눌러 내용을 적고, 번호를 찍어 보내는 식이었다.
절박함 반, 아양 반을 내용으로 금세 답장이 올 거라 기대했는데, 몇 분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삐진 건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애매한 번호로 전화가 왔다.
"거 누구십니까?"
진한 경상도 사투리의 노인 목소리였다.
"네?"
"아니, 누구십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어디 거셨는데요?"
"누군데 내한테 욕을 하시는 겁니까? 예? 와 그라십니까?"
번호 하나를 잘못 눌렀다.
"아이고 어르신! 죄송합니다. 제가 친구에게 보낸다는 걸, 잘못 눌러서 어르신에게 갔나 봅니다."
"와 내한테 이런 걸 보내시는 겁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해서 번호를 잘못 눌렀습니다."
"그러니까 와 내한테 이런 걸 보내냔 말입니다."
'왜'에 대한 충분한 해명을 몇 번이나 했음에도 노인은 같은 질문을 반복하셨다.
번호를 확인하며, 심지어 숫자 배치와 잘못 보내진 경위까지 자세히 풀어 설명했지만, 노인의 화는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괴로운 통화는 운전 중 휴대폰 사용을 단속하던 경찰에 의해 중단됐다.
"어르신! 제가 지금 운전 중에 통화하다가 경찰한테 걸렸습니다. 끊겠습니다."
과태료를 내야 한다는 불쾌감 이상의 찝찝함이 뇌리에 가득했다.
사무실에 도착해 좀 전의 해프닝을 친구에게 털어놨더니,
"그럼, 오늘 나 돈 못 주는 거야?"
"야! 이 빌어먹을 놈아!"
이때의 '빌어먹을'은 앞서 문자를 보냈을 때와는 달리, 황 씨의 '빌어먹을'과 궤를 같이 하는 분노의 발현이었다.
눈치 빠른 녀석이 태세를 전환했다.
"말이 아예 안 통해?"
"전혀. 그냥 무한 반복이야."
"사과를 해도?"
"응. 열 번은 넘게 한 것 같다. 아...... 전화 또 올까 봐 두려워."
"에이! 설마"
며칠 뒤, 설마 했던 일이 비슷한 시각에 다시 벌어졌다.
"누구십니까?"
'왜 그날 그랬냐'가 아니었다.
"어르신!"
"누구십니까?"
"제가 며칠 전에 친구에게 보낸다는 걸 실수로 번호를 잘못 눌러서 어르신께 보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누구신데 내한테 이런 욕을 하십니까?"
또다시 무한반복이었다.
변화를 주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전략으로 대응하니,
"말씀을 해보이소. 말씀을 해보시라 안 합니까? 아니 와 아무 말도 안 하십니까?"
더 괴로웠다.
사무실 주차장에 도착한 지 이미 몇 분이 흘렀고, 더는 안 되겠다 싶었다.
"어르신! 제가 지금 출근을 해야 해서요. 오늘은 이만 끊겠습니다."
끊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오늘은'이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서였는지 며칠 뒤, 또 며칠 뒤 같은 일이 반복됐다.
가장 긴 시간 통화했던 날은 사무실을 방문하기로 한 캐나다 학원 관계자와의 약속에 늦기까지 했다.
출근 전 이미 혼을 다 빼앗긴 채 사무실에 도착해 친구에게 하소연했다.
"나한테 문제 있는 거냐?"
"아니야.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고. 나이를 떠나서 그냥 남의 얘기 안 믿고, 안 듣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사과는 받아주지 않나? 사과받으면 끝나는 거잖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받지 마."
"그건 아니야. 나도 오기가 있지."
내가 말한 그 오기는 직업적 자존심에서 기인했다.
유학업은 친절한 상담을 통해 고객의 선택을 유도하는 과정을 근간으로 한다.
특히 캐나다 어학연수를 전문으로 했던 우리는, 학원 선택을 유도하는 과정에서 더 높은 커미션을 받는 곳으로의 설득이 주 업무였다.
유도와 설득.
난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잘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노인의 문장을 분석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 배경까지 추리했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며 전화에 대비했다.
그런데 하필 너무도 침울해 무기력에 빠진 날에 전화가 왔다.
중요한 계약이 무산된, 우울한 저녁이었다.
익숙한 번호가 전화기를 울리고, 나마저 울리려 했다.
좌뇌의 천사는 그동안 준비했던 논리적인 대응을, 우뇌의 악마는 화풀이를 주문하며 서로 뒤엉켜 싸웠다.
일단 전화를 받았다.
"후...... 후...... 후......"
술 취해 호흡이 가쁜 상태 아닌가 싶은, 거친 숨소리만 이어졌다.
기다리기 답답해 기운 빠진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어르신."
당연히 '누구십니까'라는 의문문으로 대응하시리라 예상했는데, 뜻밖의 공격이 날아왔다.
"야!...... 야! 이 시발자식아."
경상도에서는 '쌀'을 '살'로 발음한다지?
강한 마찰음 없는, 부드러운 발음의 시발이라서 그랬는지, 그다지 신경을 자극하지 않았다.
천사의 기세가 악마를 압도하고 있는 듯했다.
"니 누고? 니 누군데 내한테 이런 욕을 하노?"
막막했다.
아침 기운을 받은 정상적이고 논리적인 상태에조차 불가능했던 유도와 설득.
노인과 나, 지금은 둘 다 불안한 최악의 조건.
그래도 도전했다.
"친구한테 장난치려고 문자를 보낸다는 게, 번호를 잘못 눌러서 어르신한테 갔나 봅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아니 그르니까 왜 내한테 그걸 보내냐고"
미리 준비했던 대사가 있었지만, 왠지 상황을 악화시킬 것 같은 분위기였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가야했다.
오늘 내 기분을 과장한 감정선에 애드리브를 더했다.
나 : (흐느끼며) 어르신! 오늘 중요한 계약을 했어야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정말 죽고 싶습니다.
거친 숨소리 마저 멎고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젊은 사람이 와 죽노? 다시 하면 되는 기지. 어?"
여세를 몰았다.
"너무 힘듭니다. 어르신!"
"봐라. 하아...... 내도 칠십을 살면서 죽을 일 많이 겪었다이. 그래도 이맨치 살았다 아이가."
격려, 위로.
동기는 부적절했으나 반응은 진솔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노인.
전화번호, 목소리 그리고 반복된 말들.
그의 격려와 위로는 상처에 약이 되고, 용기에 힘을 채웠다.
다음날부터 다시 캐나다 메이저 학원과 계약을 맺으려 장문의 이메일로 매일 문을 두드렸다.
한 달쯤 지났을까?
드디어 바라던 계약서가 이메일로 왔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노인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하나에 매진하다 보면, 다른 사정들이 잊히고 그만큼 성취의 가능성은 커진다.
물론 성취 이후, 그간 소원했던 일들에 대한 미안함과 기다려준 성의에 대한 감사함도 커진다.
노인에게 괜스레 미안했고, 대단히 감사했다.
오랜 기간 새벽까지 장문의 영문 편지를 쓰느라 피로가 쌓여 있었다.
지친 몸을 달랠 겸 일찍 퇴근하는 길에, 노인에게 전화가 왔다.
시의적절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어떤 방식으로 전달해야 할지 자신도 있었다.
"어르신!"
"여보세요?"
느리고 흐린 노인의 음성이 아니었다.
젊은 여성의 침착한 목소리였다.
상대의 정체를 먼저 묻던 노인의 입장이 되어 물었다.
"누구시죠?"
"저희 아버지가 자주 연락하셨더라고요. 문자도 있길래, 혹시 아버지가 실수하신 게 있나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여러 번의 전화는 거리끼지 않았지만, 문자에 대한 해명은 반드시 필요했다.
당사자들의 언어, 표현과 함께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했다.
웃음이 터질 만도 한데 의외로 담담한, 한편으로는 침울한 목소리로 전해지는 그쪽의 사연.
"저희 아버지가 치매를 앓다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말씀 들어보니 단기기억상실 같은 증상 때문에 그러셨던 것 같네요. 괴로우셨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20대 후반에서 서른아홉이 되기까지 운 적 없었다.
20대 후반 마지막 눈물을 그날 흘렸다.
'빌어먹을'과 '시발 자식'은 그 고유의 뜻을 버린 채, 무거운 감정으로 변해 내 머리와 가슴에 휘몰아쳤다.
노인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 이후, 내가 거둔 성과와 내 마음을 전할 기회를 놓쳤다.
통화를 마치고, 전화기를 확인했다.
노인에게 걸려온 전화만 있을 뿐, 내가 건 전화는 없었다.
놓친 게 아니라 내가 무심했다.
그래서 더 슬프게 울었다.
욕설은 대개 그 자체로 비난받기 일쑤다.
하지만 그 욕이 품고 있는 사연은 때때로 우리를 숙연케 하기도 한다.
시장 주변에 살며 참으로 많은 싸움, 여러 욕설을 들었다.
그 욕설을 따라 한 건 내 잘못일 뿐, 나는 내가 살았던 그 환경을 탓하고 싶은 맘 없다.
딸들에게 늘 바른 언어 사용을 당부한다.
그러면서 동네 환경을 곁들여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잘못된 언어 습관을 가진 주변 아이들에 대한 경계를 강조할 뿐이다.
착하게 산 사람이 손해 보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나,
나쁜 사람이 나쁜 말을 쓰는 확률이 월등히 높다.
서울 소재 대학 진학률이 관건이라면, 할 말 없다.
그러나 바른 사람, 바른 인격에 관한 주제라면 지역, 환경을 떠나 본인 할 따름이라 주장하고 싶다.
대학 동문 여자 선배의 부모님께서 선배의 늦은 귀가를 탓하셨다고 한다.
여자가 늦은 밤에 남자 만나서 갈 때가 어딨냐고, 어디에 있다 이제 온거냐고.
선배의 답이 재밌었다.
"도대체 어디를 상상하시는 거에요? 밤 늦게 들어오면 다 거기 갔다 온 거에요? 그런 데는 낮에도 갈 수 있어요."
결국 본인 하기 나름이라는 얘기다.
나는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다.
매 순간 들리는 욕과 그에 얽힌 사연을 추정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욕설이 섞이지 않은 대화에도 같은 자세를 견지했다.
부족한 감이 있긴 하지만, 남을 이해하려는 태도로 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런 마음에, 요즘 맹모의 뜻을 좇아 사는 많은 어머니들께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어머니! 꼭 그런 건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