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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라고

물안경과 낙찰계

by Sir Lem

1. 엄마가 아들에게


감싸는 기능에 손잡이까지 갖춘 보자기.

요즘은 이바지 음식이나 특별한 선물처럼, 형식을 갖춘 자리, 국가행사에서나 겨우 보자기를 본다.

내 어린 시절은 달랐다.

시골에서 올라오신 어른들의 손에는 늘 보자기가 들려있었다.

지역 특산물, 특히 부모님이 어린 시절 좋아하시던 여러 음식 재료가 풍성하게 구성되어 있기도 했고, 재사를 위한 매끄러운 목재 제기가 조심스레 담겨 있기도 했으며, 출산을 축하하는 배넷저고리, 산후조리를 위한 미역, 찹쌀도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 막 비닐봉지를 활발하게 사용하기 시작하던 시기.

물건을 보자기에 꽁꽁 싸서 내 손에 쥐어주시며 조심스럽게 전달하라는 엄마의 심부름에는 주저했다.

지금이야 포근한 감성의 산물이라지만, 그땐 그 알록달록한 무늬들이 어찌나 촌스럽고, 부끄럽던지.

비닐봉지 없냐며 대꾸하던 아들, 대답 없이 한 번 더 매듭을 조이시던 어머니.


하지만 천덕꾸러기였던 보자기를 애타게 찾던 날도 있었다.

'주말의 명화'에 슈퍼맨이 등장했던 그다음 날로 기억한다.

동네 아이들 모두 목에 보자기를 묶고 나타나 서로 동네 슈퍼맨임을 자처했다.

날지 못하는 병아리들이 도움닫기만으로도 행복해하던 그 모습.

보자기 덕에 배역이 생기고 방식도 바뀌며, 진부하던 숨바꼭질과 도둑잡기에도 활력이 더해졌다.

놀이가 업그레이됐다.

그렇게 며칠을 흥겹게 보내다 꼬마 선각자에 의해 또 한 번의 업그레이드를 맞이했다.

지상전에서 공중전으로 확장된 전선에 수중전까지 아우를 수 있게 한 극강의 아이템,

여름을 맞아 며칠 전부터 완구점 앞에 진열돼 있던 물안경이었다.

형형색색의 물안경, 보자기를 착용한 동네 슈퍼맨들은 이제 파도를 가르기까지 했다.

현실과 SF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 광경은 어린 내게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

곧 하늘을 날듯 당당히 집을 나섰던 구시대 꼬마 슈퍼맨은 누가 볼세라 잽싸게 보자기를 풀어 접고, 일반인으로 변해 집으로 달렸다.

까다롭게 보이는 손님의 에누리를 외면하며 목장갑 낀 손으로 사과를 닦고 계신 아빠.

부엌과 방을 분주히 오가며 아빠의 식사를 차리고 계시던 엄마.

소비에 있어서는 더욱이나 엄격하셨던 아빠를 등지고 걸어 부엌 앞에서 기회를 노렸다.

사안의 중대함 때문이었는지,

그날따라 왠지 어두워 보이는 엄마의 안색 때문이었는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만 동동 구른다',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이라는 표현,

그때의 그 꼬마였던 나는 잘 안다.

우리 엄마도 눈치채고 계셨다.


"왜 그러고 있어?"


살아온 세월, 작은 키보다 못한 짧은 순간, 하지만 깊은 고민.

마침내 한 글자씩 흘렸다.


"밖에...... 애들은..... 다 물안경 쓰고 있는데...... 나만 없어."


차마 고개는 들지 못하고, 모은 손을 주시한 채 여부를 가를 엄마의 첫 문장을 기다렸다.


"귀한 내 새끼"


두 딸들 이후, 막내 이전에 태어난 장남인 나를 유독 많이 사랑하셨던 엄마.

남아선호 성향에 대한 친척들의, 누나들의 불만을 종종 겪으시면서도 큰아들에게는 더 너그러우셨던 우리 엄마.


"귀한 내 새끼. 엄마한테 사달라고 하면 되지. 왜 그러고 있어. 그게 뭐라고."


그게 뭐라고......



2. 아들이 어머니에게


찬반의 입장으로 나뉘어 수차례 열띤 토론을 벌였던 시장 상인들은 결국 매월 20일에 빠짐없이 쉬기로 결정했다.

다른 여러 이름이 있었겠지만, 하필 '시장 노는 날'로 정해진 이유에는 더 많은 노동을 염원하는 반대 측의 조롱이 섞여 있지 않았을까 뒤늦게 짐작해 본다.

계곡이나 수영장으로 놀러 가거나, 고기를 먹으러 가거나,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탕수육을 포함한 중국 음식을 시켜 먹는 등, 시장 노는 날에는 늘 특별한 이벤트가 열렸다.

혹시 비 와서 수영장을 못 가게 되면, 당시 최고의 흥행 영화 '우뢰매'를 보여 주시겠다던 약속이 깨진 날의 기억에도 그를 만회했던 두둑한 용돈이 빛나고 있다.

인터넷 키워드 검색 광고에 일찍 눈을 떠 큰돈을 벌던 성인 시절에도 시장 노는 날의 설렘은 여전했다.

내 차로, 내 돈으로, 내가 알아서 찾아가고, 사 먹을 수 있는 여유로운 청년 사업가였음에도 그랬다.

자식이 충분히 벌고 있으니, 이제 힘든 일은 그만하시라던 장남의 성화에도 매일같이 가게에 나가시던 부모님.

그 하루만큼은 부디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길 바랐다.
그 바람이 너무 간절했던 어느 시장 노는 날, 서둘러 퇴근해서 집으로 달려갔건만,

부모님은 저녁 10시가 넘어서야 오셨다.

귀한 자리에만 꺼내 입으시는 콤비와 기분 좋게 취해 만면에 웃음 가득한 얼굴로 보아 아버지는 행복한 하루를 보내신 듯했다.

작은 가전제품 하나 사는 것도 아버지 허락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 술 취한 아버지를 과감하게 흉보시며 흐뭇해하시는 표정을 보니 어머니도 행복한 하루를 보내신 듯했다.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 모임에 나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오신 두 분.

그런데 거실에서 내 방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두 분의 대화에 유쾌함과 경쾌함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다음 모임부터 낙찰계를 하기로 하셨단다.

장사해서 번 돈으로 생활비, 보험료, 적금을 빠듯하게 내시는 처지에 곗돈 100만 원은 무리였다.

8남매 장남이셨던 아버지.

도시로 나가 돈 벌어서 가족의 생계를 돕겠다는 다짐을 한 날, 짐을 싸기 위해 가방을 빌리러 간 아버지를 친구들은 외면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득이 쌀 포대에 옷가지를 담아 올라오셨다는 말씀과 그 장면이 떠올랐다.

욱하는 감정에 거실로 나갔다.


"두 머리 붓는다고 하세요."


두 머리, 200만 원, 부모님의 기를 세워드리고 싶은 아들의 자존심.


"사업하는데 지장 없겠어?"

"오메 내 새끼야."


이성적인 아버지의 염려, 감성적인 어머니의 감탄에 덤덤한 나는 자식의 당연한 도리라 생각하는 든든한 아들, 착한 아들.

그날 이후 부모님의 시장 노는 날은 온전히 당신들을 위한 행복한 날, 뿌듯한 날이었다.

그렇게 십 여 개월이 지나 그 달 시장 노는 날.

여느 때와 달리 부모님의 안색은 밝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이른 시간인데도 집에 계셨다.

일찍 만나 일찍 끝났겠거니, 식사만 하고 오셨겠거니,

그다음 달도 마찬가지였다.

피곤하셨겠거니, 대목이 눈앞이라 미리 오셨겠거니.

시장 노는 날을 며칠 앞둔 그날,

느지막이 출근하는 아들을 위해 밥을 차려주시고, 가게 나갈 준비를 하시던 여느 때의 어머니와 다른 위치, 다른 모습.


"왜 그러고 계세요?"


안 해본 일 없이 험하고, 모진 삶을 살아오셨기에 그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도 당황하는 기색 없으셨던 어머니의 난처한 표정.


"계주가...... 성남이, 그 죽일 놈이...... 도망가 부렀어야......"


어떤 심정이실지 헤아렸다.

그래서 태연한 목소리로 여쭸다.


"언제요?"

"두 달 전에 그래부렀어야."


이런 처지에 놓였을 때 가장 먼저 폭발하는 감정이 뭐였을까?

분노?, 후회?

아니.

속상했다.

속이 많이 상했다.

200만 원 한 달 또 200만 원 한 달,

자식에게 받은 400만 원을 어찌하지 못하고,

두 달을 끙끙 앓으셨던 부모님 속을 감안하니 더 속상했다.


"400만 원은 남았시야."


확인까지 해주시니, 설상가상으로 야속함마저 급하고 크게 피어올랐다.

진정하려고 내쉰 긴 한숨에 더 괴로우셨는지 흐느끼시며,


"아이고 내 새끼야 엄마가 너무 미안하다."


어머니의 떨리는 두 손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씀드렸다.


"내 돈 모으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 시장 노는 날 좋은 시간 보내시라고 한 건데, 두 달 동안 불안하게 그러고 계셨어요? 그놈의 돈 때문에?...... 그게 뭐라고."


그게 뭐라고.


3.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국에서 사업하며 큰돈을 벌었지만 남는 건 없었다.

필리핀에서는 더 큰돈을 벌었지만 그마저도 같았다.

사기를 당해도 민사나 형사로 돌려받을 수 없는 계략에 휘말려 날려야 했고,

마음까지 얹어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는 원금을 못 돌려받는 것도 모자라 배신감을 이자로 떠안아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와신상담한 후 다시 필리핀으로 건너가 전과 다른 치밀함에 절제력까지 갖춰 빠르게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손발이 맞는 동업자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속마음은 맞지 않았던 탓인지, 결국 그는 내게서 등을 돌렸다.

수십억의 손실로 인한 상실감이야 당연히 컸겠지만.

정작 나를 무너뜨린 건 그 보다 깊은 배신감이었다.

무엇을 새로 하기 겁났고, 누굴 만나기도 두려웠다.

7년이 넘는 긴 세월을 혼자 보내다시피 했다.

두 번의 끔찍한 시도를 각오하기도 했으나 글이라는 지푸라기와 가족이라는 동아줄이 손에 얽히며 지옥을 벗어나게 됐다.

스스로를 얽어맨 사건들을 회고하며 그 안의 나를 타이르고 성찰하는 데에 글은 정말 탁월했다.

환경을 바꾸면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필리핀행을 결심했다.

한국의 추운 겨울,

인생 가장 추운 시절에

필리핀의 더운 날씨,

인생 가장 화려했던 시간을 보냈던 그곳으로 돌아가면 더 큰 성찰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은 거세게 만류하셨다.

어떤 심정이신지는 전적으로 공감했지만, 가족에게도 밝히지 못한 내 과거, 내 사정, 그로부터 쌓인 응어리를 부수고 희석해서 없애려면 난 꼭 가야만 했다.

난 재기하고 싶었다.

마닐라의 한 콘도에서 홀로 지낸 1년.

누구는 돈을 벌어왔을 거라, 누구는 돈 버는 기반을 다지고 왔을 거라 추측했지만,

난 그저 깨닫고 왔을 뿐이다.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무엇을 할 때 내가 행복한지, 무엇을 하며 앞으로를 살아가야 할지,

이제는 명확해졌다.


작년 생일 즈음,

아들 없는 아들 생일을 여러 해 보내신 어머니는 며칠 전부터 카톡에, 전화에, 문자에 꼭 밥 한 끼 하고 가라 당부하셨다.

나도 몹시 그러고 싶었다.

오랜만에 맡는 미역국 냄새가 현관 앞으로 마중 나와 반겼다.

건강한 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묻고 답하는 부모 자식 간 평범한 대화 흐름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그 말.


"필리핀은 절대 가지 마라이"


이미 여러 차례 들었고, 그때마다 무응답 하거나, 단호히 거부해 왔던 터라 굳이 생일에마저 듣고 싶지 않았던 그 말.

더는 듣지 않아야 할 것 같아 마지막 필리핀행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비밀에 부쳤던 과거 행적과 함께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의 얼개를 구상하는 순간,

작은 누나가 끼어들더니 다짜고짜 언성을 높인다.


"야! 엄마 아빠가 가지 말라면 가지 마."


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를 거듭하며, 싸움으로 번지는 사이 내 필리핀 행의 이유와 목적은 대화의 테이블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말없이 보고만 계시던 아버지까지 한 편이 되어, 어느새 세 사람이 내 이동권을 구속하고 있었다.

내겐 늘 '왜'가 중요했다.

하지만 그날의 대화에는 왜를 지우는 소명의 기회가 없었다.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다시 살게 해 주었던,

다시 태어나 세상을 바로 보게 해 주었던 필리핀에서의 1년은 남은 내 인생을 더욱 값지게 살게 할 이정표였다.

인생이 무시당했다는 기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야! 그래도 밥은 먹고 가라"


8개월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살았다.

속없는 놈, 비정한 놈, 불효자라 불렸지만,

12개월 간 나를 품으며, 나를 다시 낳아준 필리핀에서의 1년을 무시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구상해 놓았던 수많은 글감 중에 하필 이 제목이 불쑥 눈에 들어왔다.

일단 써보기로 했다.

원래의 계획은 2장이 전부였다.

그런데 낙찰계 사연을 회상하던 중, 문득 내가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동업자에게 뺏긴 돈에는 아버지 땅을 담보로 대출받았던 1억도 포함돼 있었다.

내 지분에 비하자면 몇 퍼센트에 불과했지만 그래서 내가 잊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평생 구두쇠로 살아오신 아버지에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금액.

그 돈에 대해 내게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내 필리핀행을 반대하셨던 아버지.

겪은 그대로를 옮긴 1, 2장 내용을 다시 곱씹고, 그때의 나에 지금의 아버지를 대입해 보니 비슷한 성격, 비슷한 인격의 부자 사이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잘못된 판단이 확연히 드러났다.

우리 가족은 서로 뜻 전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서로의 안위를 우선시했다.

내가 낙찰계로 잃은 돈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돌려받지 못한 1억.

그날만큼은 행복하시길 바랐던 시장 노는 날은, 위험한 필리핀이 아닌 한국에서의 안전한 삶.

물질적으로나, 기간으로나, 액수로나, 인격으로나 나는 아버지에게 밀렸다.

나 없는 가족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겠지.


"몇 십억? 몇 억? 그게 뭐라고."


그게 뭐라고.


생일에 남긴 미역국 냄새가 그립다.

끓여주신 어머니가 그립다.

국을 더 내와야 하는 거 아니냐 하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과거 시장 노는 날이었던 20일, 모레.

부모님 찾아뵙고 사과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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