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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네디 Aug 07. 2023

뚫어야 산다 or 싼다

인생 여러 번의 변기 막힘 위기가 닥칠 때마다 홀로 의연히 대처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이번 위기.

왜 변기 뚜껑이 90도 이상 젖혀지지 않아 안정적으로 고정할 수 없게 설치 해놨냐며 필리핀 애들을 탓하고 싶지도 않고,왜 하필이면 거기에 양말을 걸어뒀는지 스스로를 탓하고 싶지도 않다.

뚫어야 한다는 사명으로 묵묵히 궁리와 실행을 반복할 뿐. 


나는 그저 뚫고 싶었다.


여지껏 미필적 고의로 발생했던 모든 사태.


1. 새로 산 비누 겉 비닐을 벗기려다 과하게 힘을 준 나머지 미끌어져 변기에 빠졌을 때, 

변기에서 할 일은 그저 싸고 내리는 일이요, 뭘 건져내는 일은 지극히 드물기에 무심결에 물을 내리고,

휩쓸려가는 비누를 보며, 


"Stay there!..... please" 


결국 십수차례 뜨거운 물을 대야 가득 받아 퍼부은 뒤 해결할 수 있었다.


2. 스트레스 받으면 먹는 것을 제외한 모든 생체활동이 둔해지는 성격.

그나마 먹어야 풀리기에 엄청 먹어대고, 그만큼 장을 채워 갔지만 조금도 비워내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나서야 찾아 온 신호. 

부름을 받고 급히 달려가 앉아 일합에 끝나려 큰 기합과 함께 전력을 가했는데 , 

똥이 나를 싸는 건지, 내가 똥을 싸는 건지 구분이 모호할 만큼 처절하디 처절한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긴 승부끝에 마침내 승자가 되어 처분만을 기다리는 패배자를 내려 본다.

적이었지만 훌륭했던 상대의 여전히 꿋꿋한 모습. 

이승에서 못 다 이룬 활물기생의 꿈, 저승에서 이뤄내길 바라며 처형했다.

그렇게 사라지는가 싶었는데, 튼튼한 어깨 근육으로 벽에 기대 버티는 패배자. 

산소계 표백제와 1.5리터 콜라 콜라보, 그 조합이 만들어낸 강력한 기포로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니 결국 참지 못해 물러나는 녀석.


3. 버린 음식 문제 되지 않았다. 심지어 뭉쳐진 떡국도 몰아냈다.


대개 몇 시간 혹은 반나절이면 물리쳤던 녀석들.

하지만 이번 양말 형제의 반항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하루, 이틀, 사흘......

변기 배관 관련 키워드로 검색하며 물리, 화학지식을 총 동원해 집안에 있는 물건들로 사태를 스스로 해결하려 했으나, 일말의 진척없는 답보 상태가 이어지니,

충무공께서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하셨듯 내 막힘을 남에게 알리지 않으려 했으나 주부들이라면 뭔가 신박한 아이디어가 있을까 싶해서두 인플루언서에게 알리고.



옷걸이 얘기를 하길래 플라스틱 옷걸이로나마 해결해 보려고 self customizing.



부러지지 않게 라이터로 지져서 만든 작품. 

급조한 놈 성능이 오죽하랴. 

변기물에 손이 닿는 참사를 맞고, 

배관 인플루언서도 아니요, 요리 인플루언서에게 조언을 구한 내 잘못. 

마지못해 건물 시설 관리하는 녀석을 부른다.

하필이면 영어 잘 못하는 녀석.

따갈로그로 뚫어뻥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나마 변기 막힌 사실까지는 간신히 이해시켰지만, 

plumber만 반복하는 녀석.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던 바디랭귀지로 뚫어뻥 사용 장면을 묘사한다.

마침내 알아 들으니, 그게 바로 소통이라. 

뒤늦게 밀려 오는 자괴감. 

마흔 후반에 뚫어뻥으로 변기 뚫는 모습을 시연할 줄이야. 그것도 빈손으로. 

잠시후 뚫어뻥을 가지고 돌아온 녀석.

지가 하겠다고 설치길래 100페소 주고 보냈다. 

담배 하나 입에 물고 뚫어뻥을 바라보며 결전의 의지를 다지며,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뚫을 수 있다."


그리고 치러진 양말 형제와의 맹렬한 사투......



필리핀 공산품이 다 그렇다지만, 도대체 고무에 뭘 섞은 것이냐? 

아......

10분 이상 이어진 긴 혈투, 이제는 무기마저 온전치 못한 상태.

참담한 심정으로 뚫어뻥을 바라보는데, 벌어진 얇은 틈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한줄기 빛.


'이건 필시 희망의 빛이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사력을 다한다.

그렇게 다시 5분이 흐르고,



변기 뚫고 축하 받다니.

단톡방 이름이 '블로그'니 관련된 뭐 하나 던지면 덥썩 물을 것 같아서......



몸도 마음도 성치 않은 오늘,

뚫어서 기뻤고, 나눠서 행복했다.

잠시 막힌 인생 역시 시원히 뚫기를 자신하며 희망한다.


"나는 뚫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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