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비틀어 읽기
어렸을 적 유난히 ‘옛날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때부터 빈티지의 소중함을 알았다 할까, 엔틱의 고고함을 이해했다고나 할까... (돌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던지지 마세요!)
오늘의 주제는 푸른 수염이다 프랑스에서 전해지는 전래동화라나 솔직히 내용이 동화는 절대 아닌데 말이다.
몇 가지 의문만 던져보도록 한다. 이 의문의 해답을 아시는 분은 언제든 알려주시길.
당시 배경을 보면 근대보다 중세에 가까운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식이나 뭐 그런 거 대충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니 혹시 틀리더라도 뭐라 하지는 마시길. 푸른 수염은 전처들의 시체를 집 안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창고에 걸어두었다(당시 내가 읽었던 책의 삽화를 보면 그렇다). 한두 명이 아니라 대여섯은 됐을 거다. 한 명의 부인과 아무리 짧아도 두 달은 살았을 터. 부인이 죽고 이틀 후에 재혼했다. 하더라도 첫 번째 부인이 죽은 (살해당한) 시점은 약 1년 전이란 계산이 나온다. 사람의 시체는 아무리 한겨울이라 해도 사후 익일부터 부패하기 시작한다(CSI 마니아라면 다 안다!). 물론 첨단 냉동시설로 부패를 지연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시에 그런 시설이 있었겠는가. 따라서 그 창고 주변은 물론이고 집 전체는 시체 썩는 냄새로 사람이 살 수 없는 정도가 되었어야 맞는 거다. 그런데 지금의 부인은 창고를 열고 들어가기까지 했다.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집단으로 후각을 상실했단 말인가! 냄새뿐 만이 아니다. 그 정도 되면 구더기도 몇 가마쯤은 나왔을 거다.
창고 바닥에 흥건한 피 부인은 놀라 그만 손에 든 열쇠를 떨어트리고 만다. 공교롭게도 핏물에 빠진 열쇠 이상하게도 핏빛이 가시지 않아 부인은 고민에 빠진다. 솔직히 피는 반나절(아무리 많아도 그렇지)이면 다 굳어버린다. 그리고 나는 이날 이때까지 금에 묻은 피가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실제로 금반지에 피가 묻은 적이 있었는데 침으로 닦으니까 금방 닦였다. 이 동화가 스릴러 공포 장르에 속해 있었다면 백 번 양보해서 믿어줄 맘도 있지만 이 동화의 장르는 어디까지나 동화다.
모든 비밀을 알아버린 부인과 그런 부인을 살려둘 수 없는 푸른 수염! 드디어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서슬 퍼런 도끼를 들고 쫓아오는 푸른 수염을 피해 옥상으로 도망가는 부인(차라리 문밖으로 도망치지!). 푸른 수염은 천천히 부인의 뒤를 쫓아(금방 처리할 수도 있었는데 상대가 여자라고 방심한 건가 푸른 수염?) 탑 위로 올라온다. 푸른 수염이 도끼를 치켜드는 순간 그녀의 오빠들이 달려와 푸른 수염의 등짝에 정의의 칼을 내리꽂는다! 진작 와서 데려갈 것이지 동생이 이런 수모와 공포의 도가니 속에 있는 데도 그동안 방치했단 말인가. 그러고도 가족인가. 이게 무슨 불륜 현장 잡는 것도 아니고 이혼 소송 위자료 청구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 현장을 덮쳐 달려 들어와야 했나! 기억을 떠올려보면 부인이 흰 깃발을 들면 오빠들이 구하러 오기로 했다는 그런 구절이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최종 승자는 부인이다. 단순히 최후의 생존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도 부인은 혼자서도 충분히 푸른 수염을 제압할 만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당방위의 합당한 사유와 목격자가 없으면 보험금 지급이 취소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유산이 부인에게 상속되지 않을 수도 있다. 부인은 법에 대한 지식이 빠삭했다. 그래서 오빠들과 사전 공모한 것이다. 코너에 몰아넣어 순식간에 처치하자 하고. 그럼 모든 재산이 그들 수중에 들어오는 것이다. 푸른 수염이 상당한 재력가였음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재산을 둘러싼 혼인 빙자 살인을 다룬 서스펜스 스릴러였단 말인가!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동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