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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ki Jul 10. 2019

외롭고도 찬란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오늘의 한 줄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활자중독자. 그저 텍스트이기만 하면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읽어치우던 때의 나를 가리키는 데 이보다 적확한 말은 없었다.

며칠 전 이 책을 손에 쥐고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한탸가 되었다. 기껏해야 활자중독으로 끝난 나와는 달리 삶 자체를 책에 대한 오마주로 바친 이 남자의 일생을 보며 눈물을 훔치게 되었다.

삼십오 년째 폐지더미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 종이로 뒤덮인 지하실에서 하루 종일 폐지를 압축하며 그는 서서히 활자에 물들어간다. 괴테와 실러, 에라스뮈스와 니체는 활자로 둔갑해 그의 머릿속으로 스며든다. 그렇게 방대한 활자 속에서 지성과 문학과 철학을 향유하고 난 뒤 그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인류 문명의 보고를 자신의 손으로 파괴해야 하는 고통에 울부짖은 적도 있지만 지금은 상냥한 도살자가 되어 파괴의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아무리 희귀한 장서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그저 압축된 폐지가 된다. 그러나 폐지가 늘어날수록 그의 지식과 지성은 나날이 결을 더해간다. 한탸의 독백 속 예수와 노자는 <성경>과 <도덕경> 속 주인공을 떠나, 동서양 철학의 근간을 떠나, 스스로에게 보내는 일갈이 된다. 어느 철학자가 이토록 명징한 사고를 구축할 수 있을까. 어느 사상가가 칸트에 대해 그보다 더 간결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평생을 외로이 그러나 묵묵히 책의 길을 걸었던,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고자 혼자라고 자부하던 그는 세네카와 소크라테스가 되어 승천하고자 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탓에 머리가 어질하다는 그의 마지막은 고독 그 자체였다. 책과 하나 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이상이라 생각했으나 그가 마지막에 떠올린 것은 책도 사상도 철학자도 아닌 그저 ‘사람’이었다. 더 정확히는 애정을 갈구할 ‘사람’이다. 책장을 덮는 순간 ‘툭’ 하고 ‘고독감’이 떨어지는 이유다.

한탸의 고독이, 한때 활자중독이었던 내게 천천히 스며들었다. 비 오는 날 입고 나와 버린 흰 바지처럼 되돌릴 수 없는 고독이다. 아무리 조심히 걸어도 바짓단에는 흙탕물이 점점이 박혀 있다. 처음으로 돌릴 수는 없다. 벗기 전에는.

한탸의 인생에도 화양연화는 있다. 눈물이 날 만큼 우스꽝스러운, 그러나 가슴이 미어지도록 애잔한 만차와의 한때는, 그의 인생에 깃든 야트막한 클라이맥스다. 짧지만 아련하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문장은 꼭꼭 눌러 머릿속에 집어넣어두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난다. 눈으로 찍어 하나하나 저장하고 싶어진다. 문장 속에 빼곡하게 들어찬 감각들이 말라버린 종잇장을 뚫고 바스락거린다. 체코어를 하지 못하기에 이 문장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궁금한 마음에 일어판을 구입했다. 우리나라보다 거의 10여 년 전에 출간된 일어판의 문장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오랜만이다. 소설을 읽고 활자중독의 과거를 떠올리게 된 것은. 얇디얇은 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생각이 무거워졌다. 좋은 소설은 시간이 흘러도, 언어가 바뀌어도 퇴색하지 않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제0호>를 읽으며 두 번 다시 그의 신간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 눈물 흘렸던 시간이 조금은 보상받은 기분이다. 세상에는 훌륭한 책이 많다. 내가 다 알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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