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 요코, 100만 번 산 고양이

아무렇지도 않은 삶은 삶이 아니다

by 구윤숙

태어나고 죽는 것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가정에 언제 태어날지, 어느 순간에 어떻게 죽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리스 신화가 세계의 시작으로 카오스를 설정하는 것은 이와 같은 우리 삶의 조건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보인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에 던져졌다.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인간에겐 최소한 어딘지도 모른 채 태어날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고 죽는 문제는 그보다 복잡해 보인다. 사노 요코의 명작 [100만 번 산 고양이]이는 그 복잡한 문제를 유쾌하고 시니컬하게 풀어낸다. 진한 감동과 함께.


온전한 삶의 조건


“백만 년이나 죽지 않은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것이죠. 정말 멋진 얼룩 고양이였습니다.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를 귀여워했고,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었습니다.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습니다.” [100만 번 산 고양이]


고양이는 계속 태어나고 계속 죽었는데 그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았다. 왕의 사랑을 받으며 전쟁터를 누비는 삶도, 서커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주인공이 되는 삶도 감흥이 없었다. 원치 않는 삶을 살고 있으니 화살에 맞아 죽든 공연 중에 실수로 죽든 아무 상관이 없었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주인의 슬픔도 고양이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소유물로 산다는 건, 나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건, 나의 삶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음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양이는 온전히 죽을 수 없었다.

한때 고양이는 임금님의 고양이였습니다.

[100만 번 산 고양이]가 주인의 삶에 맞춰 사는 삶을 반복하듯 우리도 타인에게 자신을 맞춰가며 하루하루를 반복한다. 부모의 욕망을 따라 어린 시절을 살고, 사회의 요구에 맞춰 청년 시절을 보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현재의 삶을 치장한다. 당신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면 자기 삶을 시작할 수 없다. 시니컬한 고양이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삶은 언제 어떻게 죽어도 아무렇지 않은 삶이고, 조금 부드럽게 표현하면 지금 당장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허무함만 남을 인생이다.

한때 고양이는 누구의 고양이도 아니었습니다.

백만 번 산 고양이의 삶은 누군가의 고양이도 아닌 도둑고양이로 태어났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자기만의 고양이가 되어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삶을 산다. 그리고 하얀 고양이를 만나 사랑을 하고, 새끼를 낳아 기르며 자기 자신보다 가족을 더 좋아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와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기도한다. 이쯤에서 독자는 위안을 받거나 뻔한 가족 영화 같은 결말에 실망하게 되는데 작가는 묵직한 반전을 선사한다. 바로 하얀 고양이의 죽음과 그것을 슬퍼하며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백만 번이나 울다가 어느 날 낮에 조용히 움직임을 멈추는 주인공 고양이의 죽음이다.

생이 카오스 속에서 우연히 생겨나듯 죽음 역시 알 수 없는 순간에 찾아왔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날아든 죽음에 대해 독자 역시 당황하고 있을 때 작가는 가장 강력한 마지막 문장을 남긴다.


(고양이는)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는 그렇게 윤회의 고리를 끊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은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 해탈의 경지.

사람들은 흔히 해탈을 세상의 번뇌에서 멀어져 혼자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상태로 생각한다. 그런데 [백만 번 산 고양이]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온전히 타자를 사랑하고 슬퍼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 해탈과 같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삶이 이번 생에 가능할까? 안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하루하루를 만들 수 있을지 않을까?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지 않으면서도 누군가를 극진히 사랑할 수 있는 하루. 잠시 눈을 감고 다시 떴을 때 그런 삶을 바로 시작해 보자.




우연을 담은 그림


[100만 번 산 고양이]는 수채화풍으로 그려졌다. 고양이는 예쁘지도 귀엽지도 않게 그려졌는데 수채화 특유의 번짐과 얼룩도 있어 소위 ‘잘 그렸다’는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작가는 스윽 별 고민 없이 붓터치를 한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그림이 이야기와 참 잘 어울린다. 수채화는 많은 채색 방법 중에 우연적인 요소가 가장 많은 기법 중 하나인데, 고양이의 무심함과 삶과 죽음의 우연성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기법 같다.


채색 기법이 그렇게 우연적인 요소에 많은 부분을 열어두고 있는 반면에 화면 구성은 굉장히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일단 고양이가 누군가의 고양이로 살던 시절에는 그림에 소품처럼 등장한다. 왕의 옆자리나 서커스 상자 틈으로 살짝 등장하는 고양이는 상황을 설명하는 보조적인 위치에 있다. 그러다 도둑고양이로 태어났을 때 비로소 화면 전면을 다 채운 주인공이 된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죽은 하얀 고양이를 끌어안고 우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몹시도 과장되어 있고 고양이의 눈물과 입에서 흐르는 침은 마치 만화처럼 표현되었다. 그런데 그 덕분에 비명이 동반된 매우 큰 고통과 슬픔이 드러난다. 반면 품에 안겨 죽어있는 하얀 고양이는 너무도 편안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누군가의 고통을 예쁘고 곱게 그리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듯, 천수를 다하고 사랑하는 사람 품에서 죽는 하얀 고양이의 평온함을 비참하게 그리는 것 역시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슬픔과 고통은 산 자의 몫으로, 평안한 안식은 죽은 자의 몫으로 온전히 그려낸 이 장면은 그래서 참으로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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