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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Feb 16. 2023

프란츠 할스의 웃음과 베르메르의 고요

자본주의의 사회의 활력과 냉소 그리고 가정주부의 일상

17세기, 가톨릭과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에서는 자본주의가 완전히 자리를 잡으며 새로운 시민사회가 만들어졌다. 황제도 사제도 없는 나라에서 정부는 주도하여 예전엔 교회가 맡아왔던 고아원과 빈민 구호시설 등을 대체할 자선단체를 만들고 시민 스스로가 방위대를 조직해 도시를 수호했다. 그들은 성서를 해석해 주거나 성사를 주관하는 사제 없이 개인이 신과 바로 교감할 수 있다고 믿으며, 화려한 교황청과 에스파냐 궁정에 맞서 청빈과 근면 등을 자신들의 새로운 윤리로 정립해 갔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위대한 화가의 붓을 빌어 처음으로 자본주의의 포문을 열고 자유로운 도시에서 호황을 누렸던 첫 인류를 만나보자.      




할스, 웃고 취하고 죽어가는 도시인의 집단초상


17세기 네덜란드 시민들의 얼굴을 가장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화가는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0~1666)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시 방위대와 같은 자치 단체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집단초상화로 남기는 것이 유행하고 있었다. 할스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보여주었다. 사실 여러 사람을 한 화면에 조화롭게 집어넣는 일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집단초상화의 목적은 기념식 날 찍는 단체 사진과 같이 조직원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이었기에 대원 모두가 같은 비중으로 화면에 등장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집단초상화는 종종 개개인의 초상화를 모아놓은 것과 같은 그림[그림 1]이 되어버렸다.


그림 1. 야코브즈(Dirck Jacobsz), <암스테르담 석궁 조합 집단초상화>, 1532, 캔버스에 유채, 115x160cm, Hermitage Museum, 네덜란드
그림 2. 프란스 할스, <성 제오르지오 시 방위대 장교들의 연회>, 1627, 캔버스에 유채, 179 x 257,5 cm, 프란스 할스 미술관, 하를럼, 네덜란드


할스의 그림은 이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는 집단초상화에 특유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성 제오르지오 시 방위대 장교들의 연회> [그림 2]에 모인 사람들은 활기가 넘친다. 그들은 만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흥겨운 여흥을 즐기다 갑자기 멈춰 선 것처럼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취기가 오른 장교들은 활기차게 떠들면서 우정과 신뢰를 다지며 번영을 약속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개개인의 얼굴에는 각기 다른 근심이 보인다. 할스의 예리한 눈은 그들이 새로운 종류의 불안과 걱정으로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초상화로 명성을 얻은 할스는 일생 동안 초상화만을 그렸다. 그는 17세기 네덜란드에 등장한 ‘전문화가’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판에 박힌 그림만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예술가였다. 새로운 소재, 새로운 표현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고상한 그림과는 거리가 먼 최하층 사람들이 할스의 눈에 들어왔고 그들의 일상이 흥미를 끌었다. 이들은 분명 그림을 주문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할스는 이 매혹적인 피사체들은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탄생한 그림이 <집시 여인>[그림 3]과 같은 작품이다.


할스는 스케치도 하지 않고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빠르게 그녀를 그려나갔다. <집시 여인>은 천진하면서도 거침이 없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과 악이 교차되며 희망과 체념이 뒤섞이고, 증오·고통·허무함을 낳는 과정을 다 보았다는 듯이 냉소적인 미소가 지나간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활력과 어둠을 동시에 품은 도시의 또 다른 표정이었다.


그림 3 프란스 할스, <집시 여인>, 1628-30, 캔버스에 유채, 58 x 52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프랑스


할스의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부르주아들의 취향은 쉽게 변했다. 그들은 귀족과 싸우며 새로운 사회를 이룩했지만 성공을 하자 자신들을 귀족처럼 고귀한 모습으로 그려줄 화가를 원했다. 할스는 그런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정직하게 붓으로 옮기는 화가였다. 날이 갈수록 주문이 줄었다. 그는 술을 많이 마셨고, 더욱더 가난해졌고, 마침내 빈민보조금을 받아서 생활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그림 4. 프란스 할스, <하를럼 양로원의 여자 관리들>, 1664, 캔버스에 유채, 172,5 x 256 cm, 프란스 할스 미술관, 하를럼, 네덜란드


그런 그에게 마지막으로 들어온 주문이 <하를럼 양로원의 여자 관리들>[그림 4]이었다. 이 그림은 할스의 비참한 생활을 반영하듯 어둡고, 차가워서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들은 아무 표정이 없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깊은 피로와 증오를 품고 있는 것 같다. 그녀들의 얼굴에 보이는 이런 감정은 말년의 할스가 느꼈을 두려움과 불안의 결과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황금기 네덜란드가 만들어내는 환상에 동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의 호황은 불황의 골짜기로 이어지고 번영의 빛은 짙은 그림자를 만든다는 걸 보았을 테니까.

 



베르메르, 소소한 일상에 바치는 고요한 예찬


시민 사회가 자신들의 모습을 기록한 새로운 방식은 장르화(Genre)였다. 장르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풍속화를 이르는 말로, 가정의 일상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말한다. 이것을 굳이 장르화라고 따로 이름 짓는 이유는, 이전의 풍속화가 귀족의 시선으로 서민들의 삶을 담아낸 그림이었던 것과 달리, 장르화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소소한 일상사에 새로운 미학을 부여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림 5. 피테르 드 호흐,  <어머니와 아이들>, 1659-60, 캔버스에 유채, 92 x 100 cm, 베를린 국립 미술관, 독일


시민층은 종교나 정치 같은 거대 담론보다 개인의 삶을 더 소중하게 여겼기에 집과 가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새롭게 그림에 등장한 주인공은 가정주부였다. 빛이 들어오는 고요한 실내에서 아기를 돌보고, 사과를 깎고, 청소를 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마치 성모의 모습처럼 거룩하게 그려졌다. [그림 5] 이런 그림들은 근면· 절제·청결 등과 같이 가정을 관리하는 여성들이 지켜야 할 미덕을 제시하는 교훈적인 그림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소박하고 진솔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예찬하는 그림이기도 했다.


장르화를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린 화가는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였다. 그는 최소한의 공간, 최소한의 인물들로 균형 잡힌 화면을 구성해 냈다. <우유 따르는 하녀>[그림 6]는 배경이 매우 단순하다. 희고 넓은 벽면엔 듬성듬성 못자국만 그려졌다. 화가가 조화로운 구성을 위해 엄격하게 사물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색과 형태도 제한적으로 쓰였다. 대비를 이루는 노랑과 파랑, 큰 사각 벽면과 작은 사각 창틀 등은 색과 형으로 채워진 추상화처럼 엄밀한 계산을 통해 선택된 것들이다.


그림 6. 요하네스 베르메르, <우유 따르는 하녀>, 1658, 캔버스에 유채, 45,5 x 41 cm, 라익스 미술관,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화가는 벽에 걸린 몇몇 물품들과 바닥에 놓인 발 보온기 등만을 남기고 실내를 정갈하게 비웠다. 이렇게 절제된 배경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더욱 하녀에게 집중되게 한다. 그녀는 우유를 따른다. 그것은 매우 일상적인 행위인데 이상하리만치 일상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씩 흘러내리는 우유, 유리창으로 내려오는 빛까지 마법에 걸린 듯 멈춰있는 실내에는 정적이 흐른다. 그 고요함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면서 평화롭고 조용한 명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유를 따르는 순간에 몰입한 여인은 평범한 하녀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어떤 성인보다도 고귀해 보인다. 인물만이 아니다. 테이블에 놓인 빵은 후광을 두른 듯 빛이 나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빛 알갱이를 하나하나 만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림 6의 부분]


그림 6의 부분


베르메르는 다른 바로크 화가들처럼 빛과 그림자를 절묘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빛은 조금 달랐다. 바로크 화가들은 카라바조처럼 많은 것들을 어둠 속에 묻어두고 인공적인 조명으로 극적인 효과를 주었다. 반면 베르메르는 창으로 들어오는 자연의 충만한 빛으로 화면을 채웠다. 그의 빛은 실내를 지극히 자연스럽고 익숙한 공간으로 느끼게 해 준다.


그림 7. 요하네스 베르메르, <골목길>, 1657-58, 라익스 미술관, 암스테르담 / 그림 8. 요하네스 베르메르, <바느질 하는 여인>, 1669-70, 루브르 미술관, 파리


따사로운 햇볕이 드리우는 행복한 집. 그것은 베르메르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일생은 힘겨웠다. 대출과 파산, 육아와 생계가 그가 싸워야 했던 인생의 가장 큰 적이었다. 그래서인가 그는 미술에서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붙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골목길에서 작은 놀이에 집중한 아이들, 바느질에 몰입한 여인[그림 7, 8]과 같은 소소한 모습에서도 그는 아름다움을 잡아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함께 놀던 아이들은 싸움을 하고, 바느질하던 여인은 고개를 들고 힘겹게 기지개를 켤 것이다. 하지만 베르메르의 화폭에서는 영원과 같은 찰나에 머물며 숭고하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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