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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Feb 11. 2023

죽음이 새겨진 정물, 화가가 발견한 신세계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새로운 주인공, 정물과 풍경

디지털카메라가 나오기 전까지 아무도 자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무엇을 샀는지를 이미지로 기록하지 않았다. 필름 카메라 시대에는 한 장의 사진을 보기까지 비용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졸업식이나 결혼식처럼 개인사에 기록할만한 순간을 담는 것이었기에 사물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인물이 없는 사진은 설악산 같은 큰 산에 올랐을 때 찍는 풍경 사진 정도가 전부였다. 이는 우리에게 사물보다는 풍경을, 풍경보다는 인물을, 일상보다는 예식을 우선시하는 가치 기준이 있었다는 걸 방증한다.


전통적인 유럽 세계에서도 이런 위계가 존재했다. 사물보다는 동물이, 필부(匹夫)보다는 영웅이, 인간보다는 신이 귀한 존재였다. 이런 위계는 회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종교화가 가장 높은 위상을 가졌고 역사화와 초상화가 그 뒤를 이었다. 풍경과 정물은 배경일뿐이었다. 그런데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풍속화와 땅과 하늘이 전부인 풍경화, 심지어 사물이 주인공이 되는 정물화까지 등장했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하늘과 땅, 컵과 과일이 주인공이 되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시민계급의 성장과 화상(畫商)의 등장


17세기, 네덜란드의 공기는 자유로웠다. 신교도들은 스페인과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독립을 이루었고, 왕과 교황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공화정을 수립하여 스스로를 다스렸다. 사상·출판·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서 유대인이나 망명자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그곳의 주류 세력은 칼뱅파 교도들이었는데, 그들에겐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근면성실하면 좋은 날이 온다는 믿음은 당시 네덜란드에선 거짓이 아니었다. 유럽은 신대륙을 약탈하며 세계적인 규모의 자본주의체제를 구축해 나갔고, 운 좋게도 네덜란드의 중산층들은 그 수혜를 받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게다가 1569년에 이탈리아와 독일의 은행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하면서 암스테르담이 새로운 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 결과 네덜란드에서는 재산에 따라 계층이 형성되는 사회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런 사회에서 화가들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탔다. 가톨릭교회와 왕실, 귀족층이 사라진 사회에서 성당과 왕궁을 위한 대형 그림들은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대신 신흥부호인 거상이나 중산층들이 새로운 고객으로 등장하면서 회화는 부르주아 가정의 실내를 꾸미는 장식품이 되었다. 그림은 정육점과 빵가게에도 걸렸다. 이동이 편리한 작은 크기의 풍속화, 풍경화, 정물화들은 이런 과정에서 생겨났다.


네덜란드 화가들의 입지는 다른 지역 화가들과 매우 달랐다. 이웃한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는 후원자들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렸으나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상품이 될 만한 그림을 그려서 미술시장에 내다 팔았다. 돈이 흘러넘치는 네덜란드에서 '미술품'은 인기 있는 '상품'이었고 예술가들은 호황을 누렸다. 이로 인해 화가들은 후원자들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졌으나 다양한 취향을 가진 소비자를 상대해야 했다. 이때 화상(畫商)이라는 새로운 직종이 등장했다. 그들은 소비자와 예술가 사이에서 중개자가 되어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예를 들어 그림 판매상들은 어느 화가의 작품 중 풍경화가 잘 팔리면 그 화가를 아예 풍경화 전문화가로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한 장르만 취급하는 전문화가가 등장할 정도로 미술시장은 커졌지만 화가들의 형편은 이내 곤두박질쳤다. 미술시장의 과다한 팽창으로 화가들이 대량으로 양산되면서 가격 하락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르주아들의 취향은 쉽게 변했다. 그들은 귀족들처럼 예술가들을 이해하고 꾸준히 후원해 주기보다 유행을 따라 새로운 그림을 찾았다. 이 때문에 프란츠 할스나 램프란트와 같은 거장들도 말년에는 가난을 면치 못했다.        



꽃과 조개껍데기, 해골의 수수께끼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정물화가 유행했다. 부유한 상인들은 화려한 꽃이나 탐스러운 과일, 각종 소라 껍데기와 광물들을 세밀하게 묘사한 정물화들을 좋아했다. 사물을 실제보다 더 실제같이 묘사한 이런 그림들은 과학적 호기심의 산물이자 부르주아의 풍요와 부를 자랑하기 위한 사치품이었다. 예를 들어 얀 브뤼겔의 <꽃 정물화>[그림 1]에 등장하는 몇몇 꽃들과 탁자 위의 조개껍데기는 해상무역을 통해 수입해 온 고가의 물건들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그림은 주문자의 박물학적 지식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양이 제각기 다른 꽃들과 신기한 조개껍데기는 동식물도감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1. 얀 브뤼겔, <꽃 정물화>, 1606, 캔버스에 유채, 65x45cm, 밀라노 성 암브로시우스 미술관

하지만 정물화가 단순히 부와 과학적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그림이었다면 그렇게 널리 유통되지 못했을 것이다. 돈을 내고 그림을 사는 사람들은 아름다움만큼이나 의미를 원했다. 정물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물들에는 의미가 있었다. 예를 들어 백합은 순결, 장미는 사랑, 카네이션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했고 조개껍데기조차 변함없는 충성심과 깨지기 쉬운 마음 등 다의양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사물과 의미가 가장 긴밀하게 연결된 정물화는 종교적 메지시를 주는 그림들이었다. 종교 개혁 이후에 신교도들은 우상이 된다는 이유로 모든 종류에 종교미술을 거부했지만 정물화에 종교적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새겨 넣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니타스’(vanitas-인생의 덧없음)를 주제로 한 정물화이다. 피터 클라스존, <책과 시계, 불 꺼진 등잔이 있는 정물>[그림 2]을 보면 술잔은 엎어졌고 영원할 것 같았던 지식(책)은 죽음과 부패를 상징하는 해골 아래서 낡아간다. 시계와 꺼져가는 등잔은 흘러가는 시간과 필멸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인간은 삶의 덧없음과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이 그림은 보여주고 있다.


그림 2. 피터 클라스존, <책과 시계, 불꺼진 등잔이 있는 정물>, 1630. 39.5x56cm,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사실 죽음은 17세기 모든 정물화를 아우르는 주제였다. 썩어가는 과일, 벌레 먹은 꽃잎, 얼마 남지 않은 촛불 등은 불안정한 삶과 반드시 찾아 올 죽음에 대한 다양한 암시였다. 네덜란드 시민들은 어떤 시대보다 호황을 누리며 호화롭게 실내를 장식하고 살았지만 자신들의 화려한 시절이 언제든 죽음으로 끝날 수 있음을 기억했던 것이다.     




하늘과 농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다


하늘과 땅, 황무지와 숲, 시골길과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의 아름다움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화가들이었다. 이전에도 풍경화는 종종 그려왔지만 대개 고대의 신전이나 폐허를 배경으로 한 이상화된 풍경이었다. 네덜란드 풍경화의 혁신성은 자신들이 사는 땅의 풍경을 자연 그대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림 3, 4]


좌) 그림 3. 살로몬 판 라위스달, <연락선>, 1647 / 우) 그림 4. 마인데르트 호베마, <미델하르니스 길>, 1689


17세기 네덜란드에는 유럽의 여느 지역과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16세기 르네상스부터 과학자들은 우주와 자연을 영적인 현상이 아닌 과학적 탐구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7세기에 이런 연구가 가속화 되어 자연에 덧씌워진 신비주의의 허울이 벗겨져나갔다. 과학자들의 연구는 유럽 몇몇 국가에서는 이단으로 몰릴 위험한 것이었지만 신교국가인 네덜란드에서는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예술분야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이어져 자연 현상을 화폭에 담으려는 시도가 이뤄졌기에 풍경화는 매우 주목받는 장르가 되었다.


또 네덜란드인들은 자기 땅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했다. 이들은 활발한 간척사업을 통해 자신들이 살 땅을 스스로 일군 농민이었고, 오랜 전쟁 끝에 막 독립을 이룩한 국민들이었다. 그들에게 조국의 대지를 그린 풍경은 어떤 영웅의 일대기 보다 더 타당한 그림의 주제였다.


 네덜란드 풍경화가들은 과학자들처럼 야외로 나가 직접 자연을 관찰했고, 스케치한 것들을 화실에서 조합하여 그림을 그렸다. 얕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와 얕은 습지,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구름은 그들이 발견한 신세계였다. 어두컴컴한 구름, 해질녘 햇살을 머금은 구름, 청명한 하늘의 흰 구름 등은 각기 다른 색채로 화폭에 담겼다. 그와 더불어 낡은 풍차, 스러져가는 농가, 어부들의 쪽배도 그려졌다. 이처럼 소박한 풍경이 지닌 평온한 아름다움을 찾아낸 17세기 풍경화가들은 대항해 시대의 어떤 탐험가보다도 위대한 발견자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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