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의 열정과 풍요, 그리고 기쁨
바로크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고향인 플랑드르(Flandre) 안트베르펜(Antwerpen)에서 처음 미술을 시작했다. 약 6년여간의 도제 기간을 거치고 그가 향한 곳은 이탈리아였다. 루벤스는 그곳에서 고대의 유물과 르네상스 장인의 작품들에 매료되어 수많은 작품을 모사했다. 하지만 그는 고전주의를 답습하는 평범한 화가가 되진 않았다. 그에겐 사물의 표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알프스 북부의 화풍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탈리아 고전주의의 특성이 모두 융합되어 있었다. 도저히 합쳐질 것 같지 않은 두 화풍이 이 위대한 화가의 붓으로 통합되어 빛나게 된 것이다.
루벤스의 고향 안트베르펜은 종교전쟁의 격전지였다. 하지만 그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는 안정을 되찾고 파괴된 교회들을 재건하고 있었다. 새롭게 단장을 시작한 교회는 대형 종교화가 많이 필요했기에 실력 있는 유학파 화가 루벤스도 주문을 많이 받았다. 그때 제작된 안트베르펜 대성당의 대형 제단화들은 루벤스 미술의 초기 양식이 잘 남아있다.
그중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움>[그림 1]은 루벤스가 북부의 세밀화 전통과 이탈리아 고전주의를 어떻게 통합시켰는지를 잘 보여준다. 십자가를 들어 올리는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남자들은 미켈란젤로의 인체를 연상시키며, 십자가의 세부와 몇몇 구성은 틴토레토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고, 빛과 색채는 베네치아 회화의 영향을 느끼게 한다. 한편 군인이 입고 있는 갑옷과 그림 왼쪽 하단에 그려진 강아지의 곱슬곱슬한 털의 세밀한 묘사는 알프스 북부의 것이다. 루벤스는 거기에 대각선 구성과 격정적인 동작, 강한 명암 대비와 피부 표면에서 일렁이는 빛의 움직임 등 자신만의 고유한 특징을 더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그림 2]은 앞의 그림보다 정적이지만 역시 이탈리아 여행의 성과가 반영된 작품이다.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 <라오콘>을 연구한 흔적이 보이고,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조법은 카라바조의 화풍을 느끼게 한다. 십자가에 매달려 천이 흘러내리지 않게 물고 있는 남자는 고귀한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노동자처럼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이 역시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두 작품에 담긴 이상적인 인체 표현은 이탈리아 고전주의가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주제와 분위기는 다분히 바로크적이다. 만약 루벤스가 고전주의자였다면 십자가 세우기가 ‘완료’된 장면 또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시신’을 안고 있는 장면을 담았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크의 대가 루벤스는 어떤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담았다. <십자가를 세움>은 전체적으로 사선 구도를 취하면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담고 있고, 비교적 정적인 분위기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도 천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예수의 시신이 고요함 속에서도 부드러운 운동감을 만들어 낸다. 이 같은 구성은 수난의 공포와 비통함을 극대화시켜서 신자들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감각적인 것으로서 반종교개혁의 취지와 맞닿아 있었다.
루벤스는 끊임없이 주문을 받았다. 그의 작품으로 기록된 그림은 소묘와 판화를 제외하고도 1300여 점에 이른다. 이렇게 다작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공장 시스템에 가까운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벤스가 간단한 스케치와 작은 견본을 그리면 제자들이 그것을 거대한 화폭에 옮겼다. 그의 곁에는 실력이 뛰어난 동업자들도 있었다. 정물화에 탁월한 화가, 동물 그림에 재능 있는 화가 등 각종 전문가들이 루벤스와 함께하며 그림의 세부를 담당했다. 루벤스는 이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는데, 그림의 값을 책정할 때에도 자기가 참여한 비율에 따라 가격을 달리했다. 이런 협업 과정의 마무리 작업은 루벤스가 맡았다. 그의 작업장을 방문한 사람들은 루벤스가 단 몇 번의 붓질만으로 그림에 생기가 돌고 활력이 넘치게 만드는 장면을 보고 찬사를 보냈다.
루벤스는 무미건조할 수 있는 주제를 특별하고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마리아 드 메디치의 생애 연작>[그림 3]은 그런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장대한 기록화이다. 이 그림들의 의뢰자 마리아 드 메디치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공주로 프랑스의 앙리 4세와 결혼하였는데, 앙리 4세가 암살로 사망하자 아들을 대신하여 프랑스를 다스렸다. 그녀는 루벤스에게 자신의 삶의 주요 장면을 기록해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업적이 없는 여왕의 삶에서 주요 장면이라 할만한 사건이 없었다. 탄생과 교육, 결혼식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루벤스에게는 이렇게 평범한 일화들을 비범하게 그려내는 재주가 있었다.
<마리아 드 메디치의 마르세이유 입항>[그림 4]은 마리아 드 메디치가 프랑스의 한 항구에 도착하는 장면을 신화와 우의를 동원하여 멋지게 윤색하고 있다. 황금으로 도금된 화려한 배에는 메디치가를 상징하는 여섯 개의 구슬이 있는 방패 문양의 문장이 달려있다. 공주가 배에서 내리자 군모를 쓴 남자가 영접을 한다. 백합문양이 새겨진 푸른 망토를 두른 남자는 ‘프랑스’를 상징한다. 선박 아래에는 바다의 신과 요정들이 마리아의 입항을 기뻐하고, 하늘에서는 명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두 개의 나팔을 분다. 당당한 모습의 공주와 예를 갖춘 ‘프랑스’, 관능적인 요정들이 한데 어우러진 이 그림은 피곤한 항해를 마치고 하선하는 평범한 사건에 극적인 광휘를 입히고 있다.
루벤스의 가장 사랑스러운 그림들은 그의 가족을 담은 작품들이다. <아이의 얼굴>[그림 5]은 그의 딸 클라라 세레나를 모델로 그려졌다. 루벤스는 이 작은 초상화에서 복잡하고 화려한 구성을 위한 아무런 기교도 사용하지 않고 순진무구한 소녀의 얼굴을 그려내고 있다. 소녀의 옷은 빠르고 거친 붓질로 채워졌고, 뒤로 묶은 머리는 한 올 한 올 금빛으로 빛난다. 반짝이는 눈망울, 미소를 머금은 윤기 있는 입술, 콧등의 하이라이트와 이마의 푸른 음영 등은 소녀의 얼굴에 생기발랄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1623년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었다. 그리고 삼 년 뒤에는 사랑했던 부인마저 사망하게 된다. 실의에 빠진 루벤스는 슬픔을 이기고자 일에 몰두하게 된다. 이때 그가 맡은 일은 고향을 떠나 스페인과 영국의 평화를 위해 양국을 오가며 외교 활동을 하는 것이었는데,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교양을 갖춘 루벤스는 외교관으로서의 역할도 탁월하게 잘 완수하였다.
아내를 잃은 슬픔은 깊었으나 그의 독신 생활을 길지 않았다. 1630년, 53살의 루벤스는 헬레나 푸르망이라는 17살 소녀와 결혼을 하여 행복한 두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루벤스는 그녀를 지극히 사랑했으며 자신의 그림에 비너스 여신으로 자주 등장시켰다.
<모피를 걸친 여인>[그림 5]이란 제목으로 유명한 헬레나의 초상화는 그녀를 그린 여러 작품 중에서도 독보적인 작품이다. 욕실에서 막 나온 듯한 여인은 검은 모피만을 두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외부에서 흘러드는 빛은 그녀의 피부를 부드럽게 비추고 카펫이 반사하는 붉은빛은 여인의 배와 팔꿈치를 분홍빛으로 물들인다. 고전 조각에서는 팔로 가슴을 가리는 동작이 정숙함과 겸손을 나타내는 표지였는데 루벤스는 비슷한 자세로 가슴을 드러내며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자세를 만들어 내고 있다.
루벤스의 엄청난 대작들은 분명 뛰어난 것이지만 현대인의 눈으로 루벤스의 그림을 본다면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왕과 귀족들을 위해 제작한 초상화는 사치스럽고 관능적인 여인들은 너무나도 풍만하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군상들은 화면을 뒤흔들고 어지럽힌다. 절제는 없다. 모든 것이 넘쳐흐른다. 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은 루벤스의 그림을 사랑했다. 그는 플랑드르 안트베르펜에 정착하여 평생을 살았지만 일개 지방 화가가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과 영국의 군주들을 위해 봉사한 전 유럽의 궁정 화가였다. 또한 그는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학자였으며, 거의 완벽하게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외교관이었고, 아름다운 외모와 열정적인 기질을 가진 기품이 있는 신사였다. 어떤 이들은 그가 너무도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그림 그리는 재주쯤은 가장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물론 루벤스의 그림 실력은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그림엔 밝은 빛과 기쁨이 넘쳐흐르고 사랑과 관능이 춤을 춘다.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루벤스의 손을 거치면 그림 전체에 화사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것은 하루하루 고된 날들을 보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낯선 것이지만 “오래 사는 것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던 천재화가 루벤스와 바로크 시대의 풍요가 만난 순간에만 탄생할 수 있었던 위대한 예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