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화가’, ‘악마적 천재’, ‘회화의 반 그리스도'
스물한 살의 나이로 로마에 등장한 카라바조(Caravaggio 본명:Michelangelo Merisi, 1573-1610)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미술가였다. 그는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며 언제든지 싸움이나 논쟁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과격한 보헤미안이었다. 그의 삶은 폭행과 투옥, 고발과 체포, 살인과 도주로 점철되어 있었다. 다채롭고 난폭한 삶은 말라리아로 끝을 맺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서른여덟이었다.
짧은 생이었지만 카라바조는 회화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과 관습은 그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기에 그는 고전주의와 매너리즘 모두를 배척했다. 카라바조는 고전 조각을 연구해 보라고 권유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 여신을 그리느니 차라리 버림받는 거리의 집시를 그리겠다’고 대꾸했다. 그의 말대로 그의 화폭엔 실제로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런 그림들은 권위와 인습에 도전하는 놀라운 작품들이었지만 불경하다는 이유로 반품되기 일쑤였다. 동시대인들은 그를 ‘저주받은 화가’, ‘악마적 천재’, ‘회화의 반 그리스도(anti-christ)’라고 불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거절된 작품들을 다른 누군가가 재빠르게 구입해 갔다. 카라바조가 회화에 불어들인 활력 넘치는 인물들이 이미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카라바조가 로마에서 처음 얻은 일자리는 도시에서 가장 가장 부유한 공방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꽃과 과일을 그리는 일을 맡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정물은 인물 주변을 꾸미는 부수적인 장식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빛의 흐름을 꼼꼼히 연구하고, 사물 표면에 비치는 반사광을 정밀하게 묘사함으로써 매우 사실적인 세부를 완성해 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정물은 인물만큼이나 중요한 회화의 대상이었기에 그는 훗날 독립적인 작품으로 <과일 바구니>[그림 1]를 그리기도 했다.
사실에 충실하려 했던 그의 고집은 첫 출세작을 안겨주었다. <카드 사기꾼>[그림 2]은 순진한 귀족 도련님을 속여 넘기는 사기꾼들의 모습을 재치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이 그림에 나타난 부드러운 빛과 각기 다른 질감의 옷감 표현 등은 섬세한 베네치아 회화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하지만 단조로운 배경과 인물의 심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특별한 감수성은 카라바조의 고유한 특성이었다.
이 그림의 주제는 당시 교황이 로마 거리 질서 확립을 위해 내세운 정책과도 관련 있었다. 교황은 결투와 무기소지를 금하고 카드·주사위 놀이를 규제했으며, 집시와 방랑자 등을 도시에서 추방했다. 심지어 팔을 노출시키지 않는 긴소매 옷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까지 만들어졌다. 그런 시대에 일상적인 소재를 이용해 교황의 칙령을 교훈적으로 보여주는 이 그림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50점이 넘게 모사되었고, 카라바조는 귀족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카라바조가 처음으로 맡게 된 큰 일거리는 로마의 한 성당에 놓이게 될 성 마태오에 관한 세 점의 그림이었다. 그중 하나인 <성 마태오를 부르심>[그림 3]은 빛과 그림자의 극명한 대조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카라바조의 화풍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세관원이었던 마태오는 번지르르한 옷을 입고 선술집처럼 보이는 어두운 실내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과 돈을 세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그리스도가 손을 뻗어 그를 부른다. 이 한 번의 손짓으로 마태오는 예수의 제자가 되어 성서를 쓰고, 선교 여행을 떠나고, 순교하게 될 것이다. 이 극적인 순간에 테이블 왼편에 있는 두 사람은 아직도 돈에 열중해 있다. 하지만 마태오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의심스러운 얼굴로 예수가 부른 사람이 자기가 맞는지 확인한다.
이 장면을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것은 예수의 머리 위를 지나 마태오의 얼굴을 비추는 빛이다. 전통적으로 빛은 사물을 묘사하기 위한 부수적인 요소였고, 창문은 빛이 들어오는 통로이자 외부를 보여주는 프레임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창문은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 빛의 출처를 알 수 없다. 카라바조는 빛을 하나의 독립된 요소로 만들었고 특별한 역할을 부여했다. 빛은 그리스도의 손짓보다 더 강력하게 마태오를 부르고 있다. 그와 동시에 평범한 공간에 극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신비한 그림자를 생산한다. 그림자가 만든 어둠은 안정과 평온함을 주고 사건이 벌어지는 비좁은 공간을 단순하게 만들면서 번거로운 거리감을 없앤다. 그로 인해 관람자는 사건의 핵심과 바로 마주하게 된다.
<성 마태오의 부르심>과 함께 놓였던 <성 마태오와 천사>[그림 4]는 성직자들로부터 거절당했다. 다리를 꼬고 앉아서 무례하게 사람들을 향해 발바닥을 보이고 있는 인물이 성자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린 소녀처럼 보이는 천사가 나이 든 남자 곁에 바짝 붙어 손을 잡는 모습은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성인과 천사를 보고 어두운 뒷골목을 오가는 거친 사내와 창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림은 거부되었고 하는 수 없이 다시 그려졌다.[그림 5] 천사는 하늘에서 내려와 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성인은 땅에서 경외에 찬 눈으로 천사를 바라보며 그 소리를 듣는다. 천사와 성인은 그렇게 멀어졌다.
<성모의 죽음>[그림 6] 역시 비슷한 이유로 설치되자마자 논란을 일으키며 철거된 작품이다. 카라바조는 기독교 회화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이 주제를 세속적인 장면으로 만들어버렸다. 죽은 성모를 맞이하는 천사도 없고, 부활을 암시하는 어떤 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어디서 들어오는지 모를 빛이 내려와 죽은 성모의 시신을 비추지만 없게 어두운 천장은 닫혀있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은 참 많은 루머를 달고 있다. “(카라바조가) 자기가 사랑했던 매춘부를 성모 마리아의 모델로 삼았다.” “익사한 매춘부를 모델로 그렸다.” 세간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 그림은 불경한 것이었다. 이 작품이 ‘성모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려줄 만한 표지는 성모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동그란 후광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성모의 죽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과 똑같다는 점이다. 작은 방엔 시신을 씻기 위한 물이 담긴 세숫대야와 작은 침대와 의자가 하나 있을 뿐이다. 죽은 성모 곁에 있는 사도들은 슬픔을 감추는 고상한 행동 따위는 알지 못하는 가난하고 평범한 노인들로 그려졌다. 성직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카라바조의 사실주의는 또 이렇게 말썽을 일으켰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카라바조의 회화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하층민의 관점에서 그려진 카라바조의 종교화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신앙을 전파하려는 반종교개혁의 정신과 맞닿아 있었다. 뒷골목 사람들, 서민들, 가난한 부랑자들을이 최초로 종교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격식 없이 놀라고, 스스럼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두려움 없이 진실로 다가선다. 카라바조는 그런 이들의 모습에서 자기 예술의 근원을 찾았고, 기적의 순간이 세속적인 일상에서 벌어진 듯 묘사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이름 없는 보통의 존재들을 회화 전면에 내세운 그림은 회화의 전통은 물론 공고한 사회적 위계마저도 뒤엎는 불온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