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가 이룩한 자연주의와 매너리즘이 고취시킨 감성의 융합
바로크는 매우 다양한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카라바조, 플랑드르의 루벤스,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스페인의 벨라스케스에 이르기까지 17세기에 나타난 다양한 회화들을 미술사에서는 바로크라는 이름으로 엮는다. 이처럼 각기 다른 화가들의 작품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바로크가 무엇이기에 이 모든 것을 통틀어 바로크라고 부르는 것일까?
미술사에 등장하는 많은 단어들이 그러하듯 바로크 역시 멸시가 담긴 말이었다. 바로크는 포르투갈어로 '일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Barroco’에서 유래한 단어로 17세기 건축의 울퉁불퉁한 겉모습을 비난하는 뜻으로 쓰였다. 르네상스 건축물[그림1]이 하나의 중심을 가진 원형을 기본으로 일정한 간격의 기둥을 세우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외관을 만든 것과 비교하면, 바로크 건축물[그리2]은 곡선을 많이 사용하고 장식도 많아 보는 사람의 눈을 어지럽힌다. 그런 까닭에 18세기 비평가들은 바로크를 야만스럽고 병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퇴폐·타락·악취미의 표본이라 여겼다.
이렇게 비난받던 바로크의 위상이 복권된 것은 20세기 중반부터였다. 새로운 역사가들은 바로크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나타나는 보편적인 문화현상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바로크가 예술 분야뿐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형태에 모두 적용되는 현상으로서 '고전주의와 대립하는 원리'라고 주장했다. 이후 바로크는 조화·안정·균형·논리성 등을 중시하는 고전주의와 대칭을 이루는 다른 축으로 불균형·무질서·충동·광기를 의미하게 되었다.
Keyword
고전주의: 조화·안정·균형·논리성 / 합리적 이성, 수학적, 자연주의 / 직선과 원형
바로크: 불균형·무질서·충동·광기 / 자연주의 + 감성 + 웅장함 / 곡선, 타원형
이런 관점을 따르면 바로크는 다양한 시대, 다양한 장소에서 발견된다.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 고딕, 매너리즘, 18세기 낭만주의와 19세기 조각가 로댕에 이르기까지 고전주의적인 세계관에 대립하는 모든 것이 바로크적인 것이 된다.
이중 미술사에서 일반적으로 '바로크 양식'이라 칭하는 예술은 17~18세기 유럽에 나타난 예술 양식을 일컫는다. 르네상스가 이룩한 자연주의적 성과와 매너리즘의 감성적이고 극적인 요소가 융합되어 웅장한 스케일로 재탄생한 양식을 바로크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바로크는 17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각국의 고유한 환경에 맞게 변화한 다양한 모습의 예술을 통칭하게 된다.
로마 교황청에게 16세기는 위기의 시대였다. 1517년 루터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북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527년 카를 5세의 연합군에 의해 자행된 로마 약탈은 잊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유럽의 기독교 세계는 분열되기 시작했고 교황의 권위는 크게 추락했다. 17세기에 나타난 바로크 미술의 한 축은 추락한 교회의 명예를 높이고 새로운 신자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1545년에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1563년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지며 종교개혁에 맞서 반종교개혁(로마 교황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내부 개혁)을 이끌었다. 가톨릭교회는 이때 경전 해석과 성사, 미사 양식 등에 관한 표준안을 정립하게 되는데 그중엔 미술에 관한 조항도 끼어있었다.
교회는 미술의 목적이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아름다움은 이차적인 것이었다. 종교화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워야 했다. 교회는 세심하게 회화에 적용될 규칙을 정했다. 예를 들어 천사들은 꼭 날개를 달고 있어야 하고, 성인들에겐 후광이 있어야 하며, 순교 장면은 반드시 공포심과 잔혹함이 감돌게 그려져야 했다.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1560-1609)의 <피에타>[그림3]는 이런 원칙에 근접한 그림이었다. 그는 베네치아 화파의 영향을 받은 화가 가문의 일원이었는데 로마로 입성하면서 '베네치아의 색채'와 '미켈란젤로의 장엄함', '라파엘로의 단순함' 모두를 절충한 작품들을 내놓았다. <피에타>의 단순하고 균형 잡힌 삼각구도는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의 유산이었다. 하지만 성모의 얼굴에 드리워진 슬픔과 주변을 감도는 무거운 어둠, 예수에 몸에 일렁이는 빛은 바로크적이다. 이 그림은 관람하는 신자들이 조용히 종교적 감응에 젖을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반종교개혁의 흐름 속에 교황들은 로마를 재건했다. 새로운 도시 계획을 세우고, 도로와 수로를 정비하고, 화려한 성당과 분수들로 로마의 외관을 바꾸었다. 바로크 예술의 특징은 무엇보다 건축에서 가장 돋보였다. 그 대표적인 예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그림4] 지구에서 가장 큰 이 성당은 브라만테가 설계한 그리스형 십자가(상하 좌우의 길이가 같은 십자가) 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지어졌는데, 그 중앙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거대한 돔이 얹힌 상태였다. 바로크 시대에는 이 모든 것을 해치지 않고 정면을 설계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었다.
마데르노(Carlo Maderno, 1556–1629)는 성당의 전체적인 구도를 라틴형 십자가(상하의 길이가 좌우의 길이보다 긴 십자가)로 바꾸면서 다양한 형태를 종합하여 정면을 설계하였다. 그는 2층을 낮게 만들어 거대한 돔의 중량감을 해소하고, 코린트 양식의 거대한 원주 8개 사이에 크고 작은 문을 배치하여 변화를 만들었다. 그 결과 돌출된 원주형 기둥으로 명암이 교차하는 효과가 만들어지면서 외관 전체에 활력을 주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대성당 건축은 마무리되자 교황청은 성당과 이어진 특별한 광장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성당에 딸린 광장에 대한 요구는 르네상스 시대에는 없던 것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성당 건축은 브라만테의 <템페이토>[그림 1]처럼 대개 독립적인 건물 하나가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는 간결하면서도 폐쇄적인 형태였다. 그런데 개방적인 바로크 시대는 건축물과 야외 공간이 소통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광장을 건축의 일부로 끌어 안게 된다. 이런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의 광장을 완성한 사람은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였다. 그는 성당 정면에서 앞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나가다 넓은 타원형 광장을 형성하는 구조로 광장을 설계했다. 이런 형태는 마치 대성당이 팔을 뻗어 광장을 손으로 감싸 안는 것처럼 보인다.[그림6]
17세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바로크 양식은 신도들의 시선을 모으고 그들의 마음을 빼앗으려는 목적과 맞물려 탄생했다. 회화는 신자들의 묵상에 잠기게 할 감성적인 형태로 변화했고 건축은 교회의 영광을 과시하는 형태로 화려해졌다. 이런 시도는 내부적인 자정노력과 합쳐져 로마 교황청이 의도했던 대로 교회의 위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일조하게 된다. 그럼에도 종교적으로 분열된 유럽 세계를 다시 하나로 합칠 수는 없었다. 이제 교회를 대신해 사람들을 엮어주는 다른 것이 필요했다.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 중심은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이에 로마에서 시작된 바로크는 각기 다른 토양을 지닌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