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윤숙 Jan 01. 2023

엘 그레코, 지중해를 떠돈 용감한 순례자

"태양 빛이 내부에 있는 빛을 가린다."

16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는 단연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그리스어: Δομήνικος Θεοτοκόπουλος 1541~1614)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탈리아어로 ‘그리스인’을 뜻하는 엘 그레코(El Greco)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리스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익힌 화가가 자신을 ‘그레코’로 칭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이름으로 자신이 예술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그리스인이라는 것을 세상에 각인시켰다.


엘 그레코의 전성기 회화에는 그가 거쳐 온 다양한 문화가 녹아있다. 그리스에서 익힌 비잔틴 미술, 미켈란젤로의 드로잉과 틴토레토의 영성, 매너리즘의 길게 늘어난 형상과 현란한 색채, 톨레도의 종교적 에너지 등. 화가는 지중해의 모든 것을 융합한 뒤에 매우 독특한 자신만의 양식을 완성해 갔다.      




떠돌이 이방인


엘 그레코의 고향인 크레타섬은 동방정교가 뿌리내린 곳이었다. 종교화는 대개 나무판에 금박을 붙이고 유형화된 도상을 따라 그리는 이콘으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13세기부터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가톨릭 신자가 늘어나고 인쇄물을 통해 서유럽의 미술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엘 그레코는 그곳에서 이콘화가로 꽤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성모영면>[그림 1]은 비잔틴 미술과 서방 문화를 융합한 화가의 솜씨를 잘 보여준다.


[그림 1] 엘 그레코, <성모영면>,  1567 1567년경, 패널에 금박과 템페라, 61,4 x 45 cm, 시로스 섬 성모영면 대성당, 그리스


 그림의 전제적인 구성은 관습적인 도상을 따랐다. 지상에서는 예수가 몸을 숙여 죽은 성모의 영혼을 받아 올리고, 천상에서는 성모가 이미 평온하게 옥좌에 앉아 있다. 금박 위에 그려진 그림은 내부로부터 성스러운 빛이 올라오는 것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엘 그레코는 전통을 따르면서도 몇몇 혁신을 불어넣었다. 중앙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빛나는 성령은 그림을 신비하게 만들면서 천상과 지상을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성모를 향해 몸을 숙이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예수의 모습은 성화에 인간적인 정서를 깃들게 했다. 여기에 더하여 화가는 그리스 여상주(여인의 모습을 한 기둥) 모양의 촛대를 세우고 그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화가의 인문학적 지식과 야망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그림 2] 엘 그레코, <사원에서 환전상들을 내쫓고 있는 그리스도>, 1571-76, 캔버스에 유채, 117x 150 cm, 미니애폴리스 미술 연구소


야심 찬 청년 엘 그레코에겐 더 넓은 세상과 더 많은 배움이 필요했다. 그는 베네치아로 건너가 이탈리아 회화의 성과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사원에서 환전상들을 내쫓고 있는 그리스도>[그림 2]는 새롭게 변한 그의 화풍을 볼 수 있다. 장대한 건축물을 배경으로 구성한 화면, 실감 나는 인체와 드라마틱한 구성은 르네상스의 회화와 매너리즘 회화 모두를 흡수하여 종합한 것이었다. 그는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 티치아노, 미켈란젤로, 클로비오(Giulio Clovio, 1498~1578 :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세밀화가로 엘 그레코의 지지자이자 친구였다), 라파엘로의 초상을 그려 넣음으로써 자신이 닮고 싶은 화가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십여 년간 많은 것을 익혔지만 엘 그레코는 베네치아에 정착할 수 없었다. 그곳엔 티치아노와 틴토레토를 비롯한 쟁쟁한 화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 넓은 무대를 찾아 로마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젊은 티치아노의 제자”라는 소개장이 있었다.


로마에 도착한 엘 그레코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좀 지나쳐서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누드화가 많아 종교적으로 논란이 되었으니, 자신이 그 자리에 완벽하면서도 가톨릭 이념에 맞는 그림을 다시 그리겠다고 교황에게 제안을 한 것이다. 그리스에서 온 이방인은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가 갖고 있는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제안으로 그는 외려 미움만 사게 되었고 결국 로마를 떠나게 된다.     




기도할 순 없지만 감동적인 성화聖畵


비록 예술의 중심지인 이탈리아를 떠나게 되었지만 엘그레코의 야망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펠리페 2세의 궁정화가가 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한다. 한때 스페인의 수도였던 톨레도는 황제가 마드리드로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곳에서 이 이방인 화가는 명성을 쌓아갔고 얼마 후 황제에게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펠리페 2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황제였다. 그에게는 아버지 칼 5세에게 물려받은 거대한 유산이 있었고,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황금도 있었다. 그렇게 막대한 부를 가진 황제는 마드리드 인근에 수도원과 도서관, 바실리카 등을 결합한 거대한 왕궁인 엘 에스코리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시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다. 많은 이탈리아 화가들이 이 거대한 사업을 위해 초빙되었고 엘 그레코도 수도원에 걸릴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그림 3]라는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그림의 주인공인 성 마우리티우스는 이집트 출신 군인들을 이끄는 고대 로마의 군인이었다.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로마의 신에게 경배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다 군인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림 3] 엘 그레코,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 1580-81, 캔버스에 유화, 448 x 301 cm, 산 로렌조 수도원, 엘 에스코리알, 스페인


이 그림에서 마우리티우스는 두 번 등장한다. 그는 전면에서 동료 군인들과 토론을 하고, 왼편에서는 함께 순교한 다른 군인들에게 축복과 위로를 보낸다. 한편 천사들은 승리의 월계관을 들고 순교자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딘가 불안정한 모습으로 하늘에 떠있다. 이렇듯 시간과 공간은 비현실적이지만 지상의 순교자와 천상의 천사들이 어우러지는 거대한 환영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예정된 장소에 걸리지 못했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배운 양식들을 버리고 자신의 놀라운 개성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추구하던 원근법과 비례는 무시되었고, 인체는 견고함을 잃고 길게 늘어났으며 그림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순교 장면을 작은 배경이 되어버렸다. 황제는 “성자들은 누구라도 그 앞에서 기도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모습으로 그려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 그림은 참신하고 탁월한 그림이었지만 기도와 예배의 대상이 되기엔 부족했다.


다행히 황제는 엘 그레코를 종교재판에 보내지도 않았고 그림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는 후한 값으로 그림을 사들인 뒤 자신의 수장고에 넣어두었다. 그곳에는 이미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작품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제단용 작품과 수집용 작품의 가치를 구분할 줄 아는 보기 드문 예술 감식가였던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엘 그레코를 다시 부르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화가는 스페인을 떠나지 않았다. 종교적 열정으로 가득 찬 톨레도에는 여전히 그에게 작품을 의뢰해 줄 교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땅과 하늘에 울리는 레퀴엠


엘 그레코의 대작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그림 4]은 톨레도의 유서 깊은 가문의 수장이었던 오르가스 백작을 마치 성인처럼 표현한 그림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장례식에는 성 스테파노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림의 전면에서는 어린 소년이 횃불을 들고 관람자를 장례식으로 초대한다. 소년의 손을 따라가면 황금색 옷을 입은 성인들이 백작의 시신을 운반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뒤로는 검은 옷을 입은 조문객들이 보이는 데 그중에 몇몇은 톨레도의 명사들이었다. 엘 그레코는 이렇게 현재 톨레도 인사들을 그립에 삽입시켜 과거의 전설을 현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림 4] 엘 그레코,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 1586-88, 캔버스에 유채, 480 x 360 cm, 산 토메 성당, 톨레도, 스페인


이 그림의 전체적인 구성은 <성모영면>을 따랐다. 지상과 천상으로 나뉜 화면, 천국으로 옮겨지는 영혼 등은 그리스 이콘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하지만 천상을 휘감고 있는 불안정한 빛과 물질적인 신체를 잃어버리고 길게 늘어난 천상의 인물들은 화가 고유의 것이었다.


엘 그레코는 점차 내적인 시각에 의지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태양 빛이 내부에 있는 빛을 가린다.”는 이유로 어두운 방에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정확히 묘사하는 것은 더 이상 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행히 톨레도는 종교적인 도시였고 이탈리아 문화와도 거리가 있었기에 엘 그레코의 작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곳에서 엘 그레코는 거의 불꽃으로 변해버린 인간의 형상과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를 만들어냈다. [그림 5] 그것은 회화사에 유래 없는 형상이었고, 자연을 벗어나 자신의 내적인 눈이 이끄는 대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간 용감한 순례자만이 볼 수 있는 환영이었다.

  

[그림 5] 엘 그레코, <성 요한의 환영>, 1608-14, 캔버스에 유채, 222,3 x 193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과, 뉴욕, 미국


이전 17화 틴토레토, 비현실적인 빛으로 그려낸 성스러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